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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정유재란과 조선의 승리 일본은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월에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입하였다. 그 사이 조선 측도 전투준비를 새로이 갖추었다.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을 우리가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고, 훈련도감을 서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었다.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지은 를 참고하여 군대를 살수, 사수, 포수의 삼수로 나누어 훈련시켜 전문적 기능을 높였다. 한편 수군에 있어서도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상, 전라, 충청도의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게 하고 군비를 증강시켰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 간첩의 농간으로 모함을 받아 파직되고 원균이 그 직을 대신하였다. 왜군은 재해권을 빼앗으려고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였는데, 원균은 부산 쪽.. 2024. 11. 10.
임진왜란 - 수군과 의병의 항쟁 왜군의 침략작전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고,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서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상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지역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때 전라도 해안 경비의 책임을 맡은 이는 일찍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운 바 있는 이순신(1545~1598)이었다. 그는 1년 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식량을 저장하여 두었다. 특히 그는 돌격선의 필요를 절감하여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던 거북선을 개량하여 재건하였는데 왜군과의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선 수군은 배의 성능과 대포의 성능에서는 일본을 능가.. 2024. 11. 3.
임진왜란 - 도요토미 히데요시 군대의 침략 15세기에는 일본에 대해 강온 양면정책을 써서 무력으로 응징하기도 하고, 세종 때 계해약조(1443)를 맺어 일본의 무역요구를 적당한 수준으로 들어주기도 하여 대일관계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인의 무역요구는 더욱 늘어나고, 삼포(부산, 울산, 웅천)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도 갈수록 많아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정부가 약속을 어긴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도리어 일본인들은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소란을 자주 일으켰다. 중종 5년(1510)에 4~5천 명의 일본인이 일으킨 삼포왜란과 명종 10년(1555)에 일어난 을묘왜변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정부는 비변사라는 상설기관을 설치하여 군국기무를 장악하게 하는 등 대책을 세웠으나, 문치의 극성기인 16세기말에 가서 국방과 .. 2024. 10. 29.
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 16세기 사림문화 성리학은 원래 개인의 도덕수양인 수기와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치인을 동시에 추구하는 학문체계였으나, 여말선초에는 제도개혁이 워낙 급한 과제였던 까닭에 치인에 초첨을 맞추어 수용되었다. 그러나 15세기말 이후로 훈척과 연산군의 비리를 경험하면서 관료의 도덕적 수양이 중요함을 깨닫고 성리학의 방향이 수기로 옮겨가게 되었다. 삼강오륜의 수신교과서인 이 정여창, 김광필 등 초기 사림들 사이에 크게 주목되고, 조광조 등 기묘사림이 이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과 더불어 임금의 수신교과서로 편찬된 것이 이황의 와 이이의 이며,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박세무의 과 이이의 이다. 특히 는 수신, 제가, 위정에 걸쳐 왕이 지켜야 할 왕도정치의 규범을 체계화한 것으로 성리학의 정치사상을 높은 수준으.. 2024. 10. 24.
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 사림의 등장과 사회, 당쟁(3) 서원과 향약  16세기 사림들이 여러 차례 사화를 당해 죽고 쫓겨나면서도 궁극적으로 사림정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여러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원은 지방선비들이 성장하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원래 유학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까닭에 고려말 이후로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유학자들은 개인재산을 털어 지방에 서재로 불리는 학교를 세우고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들어와 사화가 빈발하면서 정치에 뜻을 잃은 선비들은 아동교육에 박차를 가해 학교의 조직과 기능을 더욱 강화하고 여기에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 기능을 통합하여 서원이라는 새로운 교학기구를 창설했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37년 1542년에 사림의 한 람으로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내.. 2024. 10. 20.
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 사림의 등장과 사회, 당쟁(2) 선조대 붕당의 발생 선조는 덕망 있는 사람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의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 바치게 했다. 율곡 이이의 유명한 바로 동호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쓴 정치개혁안이다. 선조시대는 이처럼 이이를 비롯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이른바 로 불리는 문치의 절정기를 이룩했다. 그러나 그 사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사림사회에 갈등과 분화가 일어나고 유명한 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학문과 정치성향을 함께 하는 붕당이 형성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 원래 성리학에서는 도덕적으로 수양된 군자들이 붕당을 형성하는 것을 긍정했기 때문에 성리학이 발달할수록 붕당정치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최초로 붕당이 형성된 것은 선조 8년(1575)으로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사림.. 2024. 10.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