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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문화 - 역사, 지리, 예서의 편찬 1. 통치기록 성리학은 경학을 도를 담은 학문, 사학을 사건을 기록하는 학문으로 이해하고 경학과 사학을 경위, 즉 씨줄과 날줄의 관계로 본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기록문화와 역사학이 발달했다. 또 유교는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중요시하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해 정치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하여 정치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였다. 먼저, 각 관청별로 업무일지로서 을 편찬하고, 춘추관은 여러 관청의 을 모아 를 정기적으로 편찬했다. 국왕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주서는 왕과 신하 간에 오고 간 문서와 국왕의 일과를 매일 기록하여 를 작성했으며, 국왕과 대신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국무회의에는 예문관의 한림이 사관으로 참가하여 말과 행동을 나누어 기록했는데, 이를 사초라고 불렀다. 그리고 관료들.. 2024. 10. 6.
조선초기의 문화 - 성리학의 발달 조선왕조의 건국은 귀족정치를 관료정치로 바꾸는 사회혁명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귀족정치를 뒷받침하고 있던 불교를 대신하여 성리학이 지배적인 학문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혁명이 도래한 것이다. 불교비판에 앞장선 것은 정도전으로, 태조 7년(1398)에 쓴 은 동양 최고 수준의 불교비판서로 이름이 높았다. 이를 계기로 승려의 정치참여가 봉쇄되고 승려들은 산간의 종교인으로 돌아갔으며, 성리학정치가 활짝 꽃을 피웠다. 정도전의 뒤를 이어 권근이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 , 등을 저술하면서 성리학은 더욱 학문적으로 뿌리를 내렸고, 세종조 이후에는 김말, 김반, 김구 등 교육기관에서도 성리학을 가르치고, 과거시험에도 시험과목으로 들어갔다. 성리학의 기본경전은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와 오경(시경, 서.. 2024. 10. 1.
조선초기의 경제발전 1. 농업의 발전왕조개창을 전후하여 왜구가 토벌되면서 연해안지역 개발이 촉진되고, 전제개혁에 의해 농민의 생산의욕이 높아졌으며, 의학발달로 인한 인구증가와 국가의 적극적인 관농정책 그리고 사대부층의 영농법연구가 합쳐져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농업생산력을 높이려면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시비법이 중요한데, 콩과 녹두를 심었다가 갈아엎고 썩혀서 비료로 쓰는 녹비법이 개발되고, 인분과 재를 거름으로 쓰기도 하면서 땅의 비옥도가 높아졌다. 고려시대만 해도 땅의 비옥도가 낮아서 1년씩 걸러서 농사를 짓는 휴한지가 적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밭에서 조, 콩, 보리의 2년 3작이 이루어지고, 논에서는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한 지역이 늘어났다. 원래 우리나라는 비가 많은 편이 아닌 반건 기후로서 논보다는 밭이.. 2024. 9. 30.
통치체제의 재편성 - 병역제도와 군대조직 고려말에 끊임없는 외환에 시달린 경험을 살려 조선초기에는 국방강화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이면서 군대를 늘리고 정예화했다. 건국 직후에는 우선 왕자나 권신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을 혁파하여 공병으로 귀속시키는 일에 주력하여 태종 때 매듭지었다. 그러나 기왕의 군대만으로는 부족하여 모든 양인은 군역을 지게 하는 양인개병제를 밀고 나갔다. 그리하여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양인남자는 직접 군병이 되거나, 아니면 군병이 군역을 지는 동안 필요한 식량, 의복 등 경비를 부담하는 보조원이 되도록 하여 매년 무명 1필을 국가에 바치게 했다. 그러나 토지가 3~4결 이상 되는 중산층 군병에게는 보조원을 주지 않았다. 정부는 군역담당자를 확보하기 위해 노비를 해방시켜 양인 인구를 확대하고, 호적조사업을 3년마다 한번씩 .. 2024. 9. 30.
통치체제의 재편성 - 교육과 선거제도 1. 교육제도의 첫 구절은 '배워서 때에 맞추어 실천하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되어 있다. 인생의 즐거움 가운데 가장 큰 즐거움이 배움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은 예부터 교육열이 높았지만, 조선은 특히 유교국가였고 교육을 강조하는 유교이념에 따라 교육열기가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출세하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생활철학이 뿌리를 내렸다. 조선초기의 교육은 문, 사, 철 등 인문학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의 정신을 받아들여 기술학도 존중했다. 먼저, 인문교육기관으로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치하여 국비로 가르쳤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군현에만 향교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세워졌다. 학교진흥은 수령의 7사 가운데 하나가 될만큼 중요시되었다. 향교에는 양인 이상의 신분으로서 준수한 재능을.. 2024. 9. 29.
통치체제의 재편성 - 신분개편과 계층구조 1. 노비인구의 축소와 지위향상 조선초기에는 고려말 하층민의 신분해방운동을 반영하고, 의 만민평등사상을 받아들여 고려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완화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도 신분은 자유민인 양인과 비자유민인 청민으로 양분되어 있었지만, 양인 안에 특권을 지닌 문벌귀족이 있고 법제적으로는 양인이면서도 실제로는 천역을 지는 신량역천층이 많았다. 한편 천민 중에는 상층 천민인 부곡민과 하층 천민인 노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복잡한 신분층을 단순화시켜 모든 주민을 양인과 노비로 양분하고, 가능한 한 특권층과 신량역천층을 없애고 노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고려시대가 부곡민 해방시대라면, 조선시대는 노비 해방시대로 특정 지을 수 있다. 조선초기의 신분개혁은 경제적으로 대지주를 없애고, 중소지주.. 2024. 9.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