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리학은 원래 개인의 도덕수양인 수기와 백성을 올바르게 다스리는 치인을 동시에 추구하는 학문체계였으나, 여말선초에는 제도개혁이 워낙 급한 과제였던 까닭에 치인에 초첨을 맞추어 수용되었다. 그러나 15세기말 이후로 훈척과 연산군의 비리를 경험하면서 관료의 도덕적 수양이 중요함을 깨닫고 성리학의 방향이 수기로 옮겨가게 되었다. 삼강오륜의 수신교과서인 <소학>이 정여창, 김광필 등 초기 사림들 사이에 크게 주목되고, 조광조 등 기묘사림이 이를 전국적으로 퍼뜨린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소학>과 더불어 임금의 수신교과서로 편찬된 것이 이황의 <성학십도>와 이이의 <성학집요>이며, 아동용으로 만들어진 것이 박세무의 <동몽선습>과 이이의 <격몽요결>이다. 특히 <성학집요>는 수신, 제가, 위정에 걸쳐 왕이 지켜야 할 왕도정치의 규범을 체계화한 것으로 성리학의 정치사상을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린 명저다.
사림과 성리학자들이 수기에 관심을 두면서 자연히 인간의 내면세계, 즉 심성이나 우주자연의 원리에 대한 관심이 깊어졌다. 말하자면 성리학이 철학으로 발전한 것이다. 주돈이, 장재, 주희 등 송나라 성리학자들의 성리설을 모아 명나라 초기에 편찬한 <성리대전>은 이미 조선초기에도 도입되었으나, 16세기 중엽인 중종 38년(1543)에는 <주자대전>이 간행되면서 성리학 중에서도 주자학이 주류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중종 말년에 주세붕이 세운 백운동서원도 주희의 백록동학규를 참고한 것이다. 중종 38년에 영남 선비 권벌은 <주자대전>을 교정하여 <주자대전고의>를 편찬하고, 명종 11년에는 이황이 주자의 중요한 서찰을 뽑아 <주자서절요>를, 호남의 기대승은 다음 해 <주자문록>을 각각 편찬했다. <주자서절요>는 일본에 전해져 일본 주자학 발달에 큰 영향을 주었다.
주자를 비롯한 중국 성리학자들은 우주자연과 인간의 본체를 형이상의 이와 형이하의 기를 가지고 설명했지만, 인간본성과 직접 관련된 4단이나 7정과 같은 심성의 문제는 깊이 있게 탐구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황, 기대승, 김인후, 이항, 노수신, 이이, 성혼 같은 학자들이 이 문제를 가지고 서로 논쟁을 벌이는 가운데 심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해 갔다. 그리하여 16세기는 세계철학사상 유례없는 심오한 철학논쟁이 전개되었다. 활발한 철학논쟁이 전개되는 가운데 두 개의 학파가 형성되었다. 이황의 학설을 따르는 영남학파와, 이이의 학설을 따르는 기호학파가 그것이다.
퇴계로 더 알려진 예안의 이황은 선배학자 이언적의 철학을 발전시켜 주리설을 수립했다. 그는 우주만물의 본질은 순수하고 착한 형이상의 이로서 모든 만물은 그 점에서 모두 착하고 평등하다고 보았다. 그런데 이가 형이하로 발현되는 것이 기로서, 기의 세계는 천차만별의 불평등으로 나타난다고 주장했다. 이황의 주리설은 주자의 견해를 철학적으로 심화시킨 것으로, 결과적으로 형이상학적인 원칙과 규범과 명분을 존중하는 학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학설은 유성룡, 김성일, 정구, 장현광 등 영남학자들에게 계승되었다.
이에 반해 이황보다 35세 연하인 파주의 이이는 개성학자 서경덕의 영향을 받아 형이하의 기에 따라 착해지기도 하고 악해지기도 하며, 형이상의 이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형이하의 물질세계를 개혁해야 형이상의 관념세계도 바로잡을 수 있다는 인식과 연결된다. 이이가 변법경장을 주장하고, 경제가 안정되어야 도덕이 피어날 수 있다고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의 학설은 성혼 송익필, 김장생, 정엽 등에게 계승되었다.
이러한 학풍의 차이는 영남지방과 기호지방의 경제적 조건의 차이를 반영한다. 다시 말해 외부세계와 차단된 공간 속에서 자급자족적 지주기반을 안정시키려는 영남학인들은 도덕적 명분을 지키는 것이 필요했고, 외부세계와 접촉이 빈번한 열린 공간 속에서 농업과 상업을 겸행하면서 부를 창출해 가던 기호지방 학인들은 가시적인 세계에 민감하고 실리적인 학풍을 필요로 했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