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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정유재란과 조선의 승리

by 스톤나인 2024. 11. 10.

 일본은 화의가 결렬되자 1597년(선조 30) 1월에 15만 명의 병력을 동원하여 재차 침입하였다. 그 사이 조선 측도 전투준비를 새로이 갖추었다. 왜군의 신무기인 조총을 우리가 제작하여 무기의 약점을 보완하였고, 훈련도감을 서치하여 군대의 편제와 훈련방법을 바꾸었다. 속오법을 실시하여 지방군 편제를 능률적으로 개편하고, 명나라 장군 척계광이 지은 <기효신서>를 참고하여 군대를 살수, 사수, 포수의 삼수로 나누어 훈련시켜 전문적 기능을 높였다.

 한편 수군에 있어서도 이순신으로 하여금 경상, 전라, 충청도의 삼도수군통제사를 맡게 하고 군비를 증강시켰다. 그러나 이순신은 일본 간첩의 농간으로 모함을 받아 파직되고 원균이 그 직을 대신하였다.

 왜군은 재해권을 빼앗으려고 해전에서 맹렬한 공세를 취하였는데, 원균은 부산 쪽으로 진격하다가 칠전도와 고성 앞바다에서 대패하고 말았다. 왜군은 득의양양하여 육지를 마구 유린하고 9월에는 충청도 지방까지 북상하였다.

 그러나 정부군이 명나라 원군과 합세하여 이해 9월 직산에서 왜군의 북진을 차단하고 남쪽으로 밀어냈다. 한편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12척의 적은 함선을 이끌고 서해로 향하는 300여 척의 적선을 명량에서 대파하였다.

 육지와 바다에서 참패를 당한 왜군은 전의를 잃고 패주하여 울산에서 순천에 이르는 남해안 일대에 성을 쌓고 주둔해 있다가 마침 8월 18일 도요토미가 죽자 본국으로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이순신은 1598년 11월, 도망가는 왜군을 노량 앞바다에서 가로막고 최후의 일격을 가하다가 적탄에 맞아 쓰러졌다.

  전후 7년간에 걸친 조·일전쟁은 조선 측의 승리로 끝나게 되었다. 일본은 영토를 얻은 것도 없고, 조선의 항복을 받아내지도 못한 것이다. 전쟁 초반에는 우리가 고전했지만 전쟁이 장기화되면서 국민의 잠재된 국방능력이 발휘되어 일본을 압도하게 된 것이다. 유교의 문치주의가 국방을 허술하게 만든 것도 사실이지만, 유교에 의해서 배양된 충의정신과 자존심이 나라를 지키는 정신적 원동력으로 나타난 까닭이다.

 그러나 이 전쟁에서 가장 큰 손해를 입은 것은 조선 측이었다. 전국 8도가 전장으로 화하여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고, 기근과 질병으로 쓰러졌다. 토지대장과 호적이 대부분 없어져 국가운영이 마비상태에 빠졌다 전란이 끝난 지 50년이 지난 후에도 인구는 150만 명, 토지결수는 50만 결에 지나지 않았다. 이는 물론 국가의 대장에 등록된 3분의 1도 채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왜군의 방화와 약탈로 인한 문화적 손실이 매우 컸다. 불국사와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 서적, 기타 주요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약탈당했다. 그리고 수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 나가사키의 포르투갈 상인에 의해 유럽 등지에 노예로 팔려가게 되었다.

 일본은 임진왜란을 통하여 도쿠카와시대의 일본문화가 성장하는 도약대가 마련되었다. 활자, 그림, 서적을 약탈하고, 유명한 선비들과 우수한 활자인쇄공들을 포로로 데려가 성리학을 비롯한 여러 학문과 인쇄문화가 발전하는 데 기여하였다. 또 조선에서 데려간 이삼평, 심당길 등 도자기 기술자에 의하여 일본의 도자기 문화가 크게 발달하였다. 이들은 일본의 도조로 불린다.

 조선 다음으로 큰 피해를 본 것은 명나라였다. 만주의 여진족은 명과 조선이 전란에 시달리는 틈을 타서 급속히 세력을 키워 마침내 명을 멸하고 중원의 지배자가 되었다.

 왜란 후 조선의 조야에서는 명나라를 은인으로 생각하여 숭명사상이 높아지고, 명나라 군인들에 의해 관우 숭배사상이 들어와 관우묘가 여러 곳에 세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