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 사림의 등장과 사회, 당쟁(2)

by 스톤나인 2024. 10. 14.

선조대 붕당의 발생

 선조는 덕망 있는 사람인사를 대거 등용하고 문신들로 하여금 한강가의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매달 글을 지어 바치게 했다. 율곡 이이의 유명한 <동호문답> 바로 동호 독서당에서 공부하면서 쓴 정치개혁안이다. 선조시대는 이처럼 이이를 비롯한 많은 인재가 배출되어 이른바 <목릉성세>로 불리는 문치의 절정기를 이룩했다.

 그러나 그 사림학자들이 많이 배출되면서 사림사회에 갈등과 분화가 일어나고 유명한 학자를 중심으로 하여 학문과 정치성향을 함께 하는 붕당이 형성되어 서로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 원래 성리학에서는 도덕적으로 수양된 군자들이 붕당을 형성하는 것을 긍정했기 때문에 성리학이 발달할수록 붕당정치가 나타나는 것은 필연적 추세였다.

 최초로 붕당이 형성된 것은 선조 8년(1575)으로서 심의겸을 추종하는 기성사림을 서인이라 부르고 김효원을 영수로 하는 신진사림을 동인이라 불렀다. 심의겸은 서울 서쪽에 살고, 김효원은 동쪽에서 살았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서인과 동인의 분당은 문반관인의 인사추천권을 쥐고 있던 이조전랑 자리를 둘러싸고 심의겸의 아우 심충겸과 김효원이 서로 경쟁한 데서 발단되었다.

 서인은 대체로 서울과 경기, 충청, 전라도 지역의 기득권을 가진 선비들이 가세한 반면, 동인은 안동지방의 이황과 지리산지역의 조식 그리고 개성의 서경덕 학풍을 따르는 재야의 젊은 선비들이 가세했다. 서인의 정책은 치인에 역점을 두고 제도개혁을 통한 부국안민을 추구한 반면, 동인들은 선비들의 수기에 역점을 두어 치자의 도덕성 제고를 중요하게 여겼다.

 동서분당 초기에는 이이가 서인과 동인의 갈등을 조정하는데 힘써서 별다른 갈등이 없었으나, 선조 17년(1584)에 이이가 죽자 유성룡, 이산해, 이발 등 동인이 정권을 장악했다. 그러나 선조 22년(1589)에 동인에 속한 전주출신 선비 정여립 일당이 모반을 일으켰다가 발각되어 진안 죽도에서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 다수의 동인들이 처형되었다. 이를 기축옥사라 한다. 그러나 2년 뒤인 선조 24년에 서인 좌의정 정철이 세자 책봉을 선조에게 건의하자 동인은 이를 문제 삼아 서인파를 내몰았다. 그런데 서인에 대한 처벌을 둘러싸고 동인 안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갈려 전자를 북인, 후자를 남인이라 불렀다. 북인은 대체로 조식과 서경덕 문인들이 주류를 이루고, 남인은 이황 문인들이 핵심을 이루었는데, 기축옥사 때 피해를 입은 이들이 북인들이었으므로 이들이 서인에 대한 반감이 더 컸다.

 정철일파의 실각으로 동인 특히 북인들이 우세한 가운데 임진왜란(선조 25, 1592)이 일어났는데, 후궁 공빈김씨 소생인 광해군이 세자로 책봉되자 분조를 이끌고 대일항전을 펼쳤다. 그런데 왜란이 끝난 뒤인 선조 34년에 선조의 계비인 인목왕후가 뒤늦게 영창대군을 낳자 북인들은 광해군을 추종하는 대북과 영창대군을 옹립하려는 소북으로 갈렸다. 대북은 광해군의 능력을 중요시하고, 소북은 영창대군의 혈통을 존중했다.

 선조가 돌아가고 광해군(1608~1623)이 즉위하자 왜란 중 광해군을 따라 항일전쟁을 주도한 대북이 권력을 장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