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과 향약
16세기 사림들이 여러 차례 사화를 당해 죽고 쫓겨나면서도 궁극적으로 사림정관을 세울 수 있었던 것은 향촌사회에서 세력을 확대 재생산할 수 있는 여러 조직체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원은 지방선비들이 성장하는 중요한 기반이었다. 원래 유학은 교육을 중요시하는 까닭에 고려말 이후로 성리학이 확산되면서 유학자들은 개인재산을 털어 지방에 서재로 불리는 학교를 세우고 자제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들어와 사화가 빈발하면서 정치에 뜻을 잃은 선비들은 아동교육에 박차를 가해 학교의 조직과 기능을 더욱 강화하고 여기에 선배 유학자들을 기리고 제사하는 사당 기능을 통합하여 서원이라는 새로운 교학기구를 창설했다.
최초의 서원은 중종 37년 1542년에 사림의 한 람으로서 경상도 풍기군수로 내려간 주세붕이 고려말 유학자인 안향의 고향인 경상도 순흥면 백운동에 회헌사라는 사당을 세우고, 다시 그 옆에 백운동서원이라는 학교를 세운 데서 비롯되었다. 이 서원은 그 후 명종 5년(1550) 풍기군수로 새로 부임한 이황이 임금에게는 주청하여 소수서원이라는 편액을 하사 받고 토지와 노비, 서적 등을 아울러 받았다. 이렇게 국가로부터 편액을 하사 받고 각종 지원을 받는 서원을 사액서원이라고 하는데, 이런 서원에는 면세와 면역의 특권까지 부여했다.
국가의 서원장려정책에 힘입어 서원은 갈수록 늘어나서 명종 때에 17개였던 서원이 선조 때에는 사액서원만도 100개를 넘어서게 되었으며,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가장 많았다. 조선후기에는 서원이 더욱 늘어나서 18세기에는 7백여 개소에 이르고, 고종 초에는 1천여 개소를 헤아리게 되었으며, 그중의 약 3분의 1이 사액서원이었다.
서원은 처음에는 관학인 향교와 경합관계에 있었으나, 차츰 향교보다 수도 많아지고 권위도 높아졌다. 그리하여 양반자제들은 대개 서원에 입학하고, 평민자제들은 향교에 들어가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서원의 증설은 유학발전을 촉진시키고, 향촌 문화를 높이는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서원마다 모시는 선현들이 따로 있어서 자연히 학파와 붕당을 결속시키는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또 경제적으로 면세와 면역의 특권을 이용하여 부를 축적하고, 국가경제를 위축시키는 역기능도 갈수록 커졌다. 그래서 조선후기에는 서원을 통제하는 것이 국가저액의 주요 과제로 떠올랐다.
한편, 서원과 더불어 향촌사회에서 사림의 지위를 강화시키고, 향촌사회의 도덕질서를 안정시키기 위해 도입한 것이 향약이었다. 중종 때 조광조 일파는 처음으로 <여씨향약>을 도입하여 이를 국문으로 번역하여 전국에 보급했는데, 이는 송나라 여대균이 만든 것을 주화가 뒤에 수정한 것이다. 그 주요 강령은 덕업상관, 과실상규, 예속상교, 화난상휼로서 향촌사림들이 자치적으로 규약을 맺어 착한 일을 서로 권하고, 잘못을 서로 규찰하며, 예절을 서로 지키고, 어려운 일을 서로 돕자는 것이다. 그런데 향약은 단순한 규약이 아니라, 규약을 잘 지킨 자는 상을 주고 어긴 자는 벌을 주었는데, 심한 경우에는 마을에서 쫓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향약의 시행은 조광조 일파가 몰락하면서 중단되었다. 이는 향촌사회에서 향약을 주도하는 사림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중앙 훈구대신들의 향촌에 대한 지배력을 약화시키고 관권을 무력화시키고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명종, 선조 때에는 사림이 다시 득세하면서 우리나라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의 향약이 만들어져 군현이나 마을을 단위로 시행되었다. 특히 영남지방은 이황이 만든 예안향약을 모델로 하여 도덕중심의 향약이 유행하고, 기호지방에서는 이이가 청주와 해주 등지에서 만든 향약을 모범으로 삼았는데 이는 향약과 전통적인 계조직을 결합시켜 경제적 상부상조에 역점을 둔 것이 특징이었다. 경제가 안정되지 않으면 도덕이 꽃피기 어렵다는 이이의 철학이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림들은 향약을 시행하면서 동시에 양반사족 명단인 향안을 작성하고 유향소의 향권을 장악했으며, 일종의 지방의회라고 할 수 있는 향회를 조직하여 이른바 공론을 형성하고 정치에 영향을 주었다. 또, 향촌사회에서 사족상호 간의 도덕질서를 세우기 위해 김안국 같은 이는 오륜 중에서 붕우유신과 장유유서를 강조하면서 이를 사제관계에까지 적용시킨 <이륜행실>을 편찬하여 보급했다.
이 밖에 <소학>의 보급도 향촌사회 안정에 기여했다. 이 책은 주희의 제자가 지은 것으로 삼강오륜의 구체적인 행동규범과 충신, 효자의 실례를 소개하면서, 뒷부분에 <여씨향약>을 소개한 것이다. 이 책은 아동용 교재로 널리 읽혔는데 국문으로 된 언해본도 나오고, 고종대에는 박재형이 우리나라의 사례를 많이 넣어 <해동소학>으로 간행하기도 했다.
조선후기에는 향약이 더욱 발전하여 마을단위, 친족단위, 사족단위 등으로 확산되어 가면서 양반사족층의 단결과 향촌지배력이 커지고 도덕규범이 뿌리내리는데 기여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에 시간이 지날수록 양반·사족층이 보수화하면서 향약은 농민층을 억압하는 수단으로도 악용되어 18세기말의 정약용은 향약의 폐단이 도적보다도 심하다고 악평하기도 했다.
16세기 후반에 향약을 비롯한 향촌자치가 뿌리를 내리면서 지금까지 관과 민으로 대칭되던 지배종속관계가 차츰 사와 민의 지배종속관계로 바뀌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는 경제적으로 보면 지주제가 정착되어 지주와 작인의 대칭관계가 형성된 것과 서로 맞물려 있었다. 그리고 사족=양반층은 평민과 노비를 하인 혹은 상민으로 부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