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에는 일본에 대해 강온 양면정책을 써서 무력으로 응징하기도 하고, 세종 때 계해약조(1443)를 맺어 일본의 무역요구를 적당한 수준으로 들어주기도 하여 대일관계는 비교적 안정되었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서 일본인의 무역요구는 더욱 늘어나고, 삼포(부산, 울산, 웅천)에 거주하는 일본인 수도 갈수록 많아졌다. 이에 위협을 느낀 정부가 약속을 어긴 일본인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자, 도리어 일본인들은 대마도의 지원을 받아 소란을 자주 일으켰다. 중종 5년(1510)에 4~5천 명의 일본인이 일으킨 삼포왜란과 명종 10년(1555)에 일어난 을묘왜변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조선정부는 비변사라는 상설기관을 설치하여 군국기무를 장악하게 하는 등 대책을 세웠으나, 문치의 극성기인 16세기말에 가서 국방과 군역제도는 더욱 허물어졌다.
서인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내세웠을 때, 동인 인사는 이를 평지풍파라고 배격하였고, 일본에 다녀온 서인 정사가 일본에 대한 경계를 주장하였을 때, 동인 부사는 이를 공박하고 대일안심론을 폈다. 조정의 의논이 일치되지 않았다.
이 무렵 일본의 역사는 우리와 정반대로 흐르고 있었다. 백여 년간에 걸친 전국시대의 혼란이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서 수습되고 있었다. 국내통일에 성공한 도요토미는 지방세력가인 다이묘들의 관심을 밖으로 분출시키고, 그 여세를 몰아 대륙과 한반도를 정복하려는 야욕을 품게 되었다. 16세기 중엽부터 포르투갈과 교역하면서 성장한 상인세력은 이 전쟁을 배후에서 지원했다.
일본은 침략에 앞서 정탐꾼(승려)을 보내어 조선의 산천과 정치정세에 대한 정보를 세밀하게 수집하는 한편, 서양의 총포술을 도입하여 개량한 조총으로 군사들을 무장시켰다. 일본은 조선침략의 구실로 명을 치러 가는 데 필요한 길을 빌리자고 요청했다. 이른바 정명가도이다. 조선은 물론 이러한 제의를 거절했다.
1592년(선조 25) 4월에 약 20만 명의 왜군이 아홉 부대로 나뉘어 조선을 침략하였다. 4월 14일 뜻밖에 적군을 맞이한 부산의 군·민들은 첨사 정발의 지휘 아래 장렬하게 싸웠으나 성은 끝내 함락당하고 말았다. 부산을 유린한 왜군은 동래성으로 말려들었다. 이곳 군·민들은 동래부사 송상현의 지휘 아래 치열하게 항전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하였다.
그 후 왜군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을 향해 북상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은 신립 장군을 내려 보내어 충주의 탄금대에서 배수의 진을 치고 싸우게 하였으나 역시 적을 막아 내지 못하였다. 왜군이 서울 근교에 육박하자 선조는 4월 29일 세자와 함께 의주로 피난하고, 임해군과 순화군 등 두 왕자를 함경도와 강원도로 보내고 근왕병을 모집하게 하였다. 그러나 부산에 상륙한 지 18일 만에 서울을 유린한 왜군은 그 해 6월에 평양과 함경도까지 유린하고, 왕자를 포로로 잡았다. 정부의 무능에 분격한 국민들은 피난하는 선조의 어가를 막으면서 원성을 터뜨리고, 서울에서는 일부 노비들이 관청을 파괴하기도 하였다. 그만큼 정부는 전쟁에 대한 준비가 부족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