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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 수군과 의병의 항쟁

by 스톤나인 2024. 11. 3.

 왜군의 침략작전은 육군과 수군이 동시에 진격하되, 육군은 세 길로 나누어 북상하고, 수군은 남해와 서해를 돌아서 물자를 조달하면서 육군과 합세하여 북상하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일본 수군은 경상도 해안지역을 약탈하면서 전라도 해안을 향하여 접근해 오고 있었다. 이때 전라도 해안 경비의 책임을 맡은 이는 일찍이 여진족 토벌에 공을 세운 바 있는 이순신(1545~1598)이었다.

 그는 1년 전에 유성룡의 천거로 전라좌수사에 부임한 이래 왜군의 침입이 있을 것을 예견하여 수군을 훈련시키고 무장을 갖추며, 식량을 저장하여 두었다. 특히 그는 돌격선의 필요를 절감하여 조선초기에 만들어졌던 거북선을 개량하여 재건하였는데 왜군과의 해전에서 큰 위력을 발휘하였다. 조선 수군은 배의 성능과 대포의 성능에서는 일본을 능가하였으며, 화공술이 뛰어났다.

 이순신이 이끄는 수군은 5월 초부터 적군을 맞아 옥포(거제도)에서 첫 승리를 거두고, 이어 5월 말부터 6월 초에는 이억기 장군이 이끄는 전라우수영 및 경상우수영의 함선과 합세하여 사천, 당포, 당항포 등지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이어 6월 말에서 7월 초에 걸쳐 왜군이 다시 총공격을 가해 오자 이순신 함대는 한산도 앞바다로 적을 유인하여 교묘한 전술을 대파하였다. 이 싸움은 전란 중에 거둔 3대 승리의 하나로 꼽힌다. 이러한 이순신 함대의 활약으로 해상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북진하는 육군과 합세하려던 일본의 작전이 무너졌으며, 전라도의 곡창지대를 안전하게 지킬 수 있었다.

 해전에서의 잇단 승리와 때를 같이하여 육지에서도 사방에서 의병이 일어나 자발적으로 부대를 조직하여 향토방위를 위해 일어섰다. 이 자발적인 무장부대들은 나라에 대한 충의를 걸고 싸웠기 때문에 의병이라고 부른다. 의병은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으나, 그들을 조직하고 지도한 것은 전직관료와 사림 그리고 승려들이었다. 유교를 발전시킨 것이 국방을 소홀히 한 점도 있지만, 그 대신 국민들의 충성심을 배양하여 그 저력이 서서히 드러나게 된 것이다.

 의병들은 향토지리에 익숙하고, 향토조건에 알맞은 무기와 전술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적은 병력으로 대군과 적대하기 위해서 정면충돌보다도 매복, 기습, 위장 등과 같은 유격전술을 많이 써서 적에게 큰 괴로움을 주었다. 의병은 각처에서 일어나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우나, 그중에서도 많음 전과를 거두고 명성을 떨친 사람은 평안도의 조호익, 양덕록, 휴정, 함경도의 정문부, 경기도의 김천일, 심대, 홍계남, 경상도 의령의 곽재우, 고령의 김면, 합천의 정인홍, 영천의 권응수, 충청도의 조헌, 전라도의 고경명, 황해도의 이정암, 강원도의 유정 등이다. 지역적으로 보면 유학이 발달한 남부지방이 가장 의병투쟁이 강하였다.

 전란이 장기화되면서 왜군에 대한 반격작전은 한층 강화되어, 지금까지 산발적으로 일어난 의병부대 등을 정리하여 관군에 편입시켜 관군의 전투능력이 강화되고 작전이 한층 조직성을 띠게 되었다. 육해의 모든 전선에서 반격을 강화하던 1593년 1월 한국계 중국인 이여송이 거느린 5만 명의 명나라 지원군이 도착하여 조선군과 합세하였다. 일본은 전쟁 초기부터 정명가도를 내세워 대륙침략을 공언했으므로 명은 자위책으로 지원군을 파견한 것이다.

 조·명 연합군은 먼저 평양성을 탈환하고, 남으로 왜군을 추격하다가 고양의 벽제관에서 패하자 명군은 평양으로 후퇴하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웅거 하여 명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탈환하려다가 명군의 후퇴로 고립상태에 빠졌으나 적은 병력으로 피나는 전투를 벌여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해 온 왜군을 물리쳤다(1593년 2월). 이 전투에서는 부녀자들까지 참전하여 치마에 돌을 날라 '행주치마'라는 말이 나왔다 한다. 이 전투는 1592년 10월에 김시민이 진주성에서 거둔 방어전의 승리 그리고 이순신의 한산도 승리와 아울러 임진왜란의 3대 승리의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조·명 연합군의 반격에 예기가 꺾인 왜군은 휴전을 제의하였으며, 명도 이를 받아들여 왜군은 1593년 4월 서울을 버리고 경상도 해안일대로 물러났다. 그러나 명과 일본 간의 화의담판은 피차 승리를 자처하는 가운데 3년간 끌다가 결렬되고 말았다. 그 사이 일본군은 경상도 연해지방에서 성을 쌓고 방어시설을 갖추면서 재기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