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통치기록
성리학은 경학을 도를 담은 학문, 사학을 사건을 기록하는 학문으로 이해하고 경학과 사학을 경위, 즉 씨줄과 날줄의 관계로 본다. 따라서 조선시대에 성리학이 발달하면서 기록문화와 역사학이 발달했다. 또 유교는 정치에 대한 백성들의 믿음을 중요시하고, 그 믿음을 얻기 위해 정치에 대한 기록을 철저히 하여 정치의 투명성과 책임성을 높였다.
먼저, 각 관청별로 업무일지로서 <등록>을 편찬하고, 춘추관은 여러 관청의 <등록>을 모아 <시정기>를 정기적으로 편찬했다. 국왕 비서기관인 승정원의 주서는 왕과 신하 간에 오고 간 문서와 국왕의 일과를 매일 기록하여 <승정원일기>를 작성했으며, 국왕과 대신이 모여 국정을 논의하는 국무회의에는 예문관의 한림이 사관으로 참가하여 말과 행동을 나누어 기록했는데, 이를 사초라고 불렀다. 그리고 관료들의 임면은 조보를 만들어 알려주었다.
왕위가 바뀌면 실록청을 설치하고 200명 전후의 편찬위원을 임명하고, 전왕의 통치기록인 사초, 시정기, 승정원일기, 조보 등을 모두 합하여 실록을 편찬했다. 실록은 4부를 만들어 서울에는 춘추관에 보관하고, 나머지는 전라도 전주, 경상도 성주, 충청도 충주에 사고에 설치하여 분산 보관했다. <조선왕조실록>은 통치전반을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천재지변에 관한 기록까지 담고 있어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한편 조선초기부터 왕실의 혼사, 장례, 궁중의 잔치, 국왕의 행차, 궁궐의 영건 등 주요 사건이 있을 때에는 따로 <의궤>를 만들어 행사의 주요 장면과 주요 도구를 그림으로 그려 넣고, 행사의 진행과정과 참가자 그리고 행사비용 등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으로, 왜란 이전의 <의궤>는 불행하게도 지금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의궤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것으로 조선후기의 궁중풍속과 재정상황 등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2. 역사편찬
고려와 다른 성리학적 정치이념을 가지고 건국된 조선왕조는 성리학의 가치기준에 따라 과거의 역사를 새롭게 정리했다.
먼저 태조 때부터 고려역사를 편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정도전과 정총 등이 37권의 편년체 <고려사>를 태조 4년에 완성했으나, 국왕보다 재상의 역할을 강조한 것이 문제가 되어 태종~세종 때 수정작업이 이루어져 문종 원년(1451)에 기전체로 된 <고려사>가 정인지 등에 의해 완성되었다. 그 후 문종 2년에는 김종서 등이 정도전의 <고려사>를 보완하여 편년체 <고려사절요>를 편찬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는 성리학적 가치관을 가지고 고려역사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공통점이 있으나 전자는 국왕을, 후자는 재상을 중심에 두고 고려역사를 정리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그리고 재상중심의 고려사를 편찬한 정도전과 김종서는 각각 태종과 세조의 미움을 받아 비운의 죽음을 맞이했으며, 왕실에서는 <고려사>를 더 적극적으로 보급했다.
세조는 자신의 전제왕권 강화와 부국강병정책을 뒷받침하기 위해 성리학적 사관을 거부하고 고조선과 고구려 중심의 웅장한 고대사를 다시 편찬하여 이를 <고려사>와 연결시켜 <동국통감>을 편찬하고자 했으나, 자료의 신빙성이 떨어지는 고기류의 이용을 거부한 신하들의 비협조로 완성을 보지 못했다. 그리하여 성종 7년(1476)에 이르러 신숙주, 노사신 등이 세조 때의 원고를 수정하여 <삼국사절요>를 편찬했다. 이 책은 <삼국사기>에 빠진 고조선사가 보완되었다.
그 후 성종 15년(1484)에 서거정 등 훈신은 <삼국사절요>와 <고려사절요>를 합하여 <동국통감>을 완성했으나, 왕은 사림계열 관료를 참여시켜 다시 수정하여 <신편동국통감>을 다음 해 완성했다. 이것이 오늘날 전하는 <동국통감>이다.
3. 지도, 지리지, 예서의 편찬
조선초기에는 중앙집권이 강화되면서 전국 각지의 자연 및 인문지리에 대한 조사가 깊어지고, 이를 토대로 지리지와 지도의 제작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먼저, 지도는 태종 2년에 의정부 정승인 이무와 김사형이 발의하여 의정부 검상 이회가 제작하고, 권근이 발문을 쓴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라는 세계지도를 제작했다. 이 지도는 아라비아 지도학의 영향을 받아 만들어진 원나라의 세계지도를 참고하고, 여기에 한반도와 일본 지도를 첨가한 것으로, 중국과 한국을 크게 그렸는데 유럽, 아프리카 등도 그려져 있다. 아메리카대륙은 아직 발견되지 않아 지도에 빠져 있다. 이 지도는 지금 원본이 없으며, 후대의 모사본이 여러 종류 일본에 전한다.
한편 지리지 편찬은 세종 때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져 세종 14년(1432)에 <신찬팔도지리지>가 완성되었으며, 이를 축소하여 단종 2년(1454)에 편찬한 <세종실록>의 부록으로 넣었는데, 이것이 <세종실록지리지>이다. 이 책은 군현 단위로 연혁, 인물, 고적, 토지, 호구, 성씨, 군정수, 물산 등 60여 항목을 기록하고 있어서 <고려사> 지리지보다는 한층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지리지 편찬사업은 문종~세조 때에도 계속되었는데, 이때는 부국강병정책의 영향을 받아 군사적 사항이 더 상세하게 조사·기록되었다. 양성지가 주도하여 편찬한 지리지는 성종 9년(1478)에 완성되어 <팔도지리지>라 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지금 전하지 않는다.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예종 원년(1469)에 편찬된 <경상도속찬지리지>뿐이다.
조선초기에는 국가의 여러 행사의 규범을 새로이 정비할 필요에서 행사 때마다 의궤를 편찬하고, 아울러 모든 의례의 규범서로서 성종 5년(1474)에 신숙주, 정척 등에 명하여 <국조오례의>를 편찬했다. 이 책은 모든 의례를 길례, 가례, 빈례, 군례, 흉례 등 다섯 가지 의식으로 나누어 정리한 것이다. 그리고 끝에는 관료와 사서인들의 장례의식을 첨가했다.
일반 백성들의 윤리서로는 세종 16년(1434)에 설순 등이 왕명으로 <삼강행실도>를 편찬했는데, 이 책은 중국과 우리나라 효자, 충신, 열녀 중에서 모범이 될 만한 인물 300여 명을 뽑아 그들의 행적을 그림으로 붙여서 설명한 것이다. 이 책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전에 한문으로 편찬되었으나, 세종은 이 책을 편찬하면서 알기 쉬운 국문자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하고 훈민정음 창제에 박차를 가하기 시작하여 세종 25년에 완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