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노비인구의 축소와 지위향상
조선초기에는 고려말 하층민의 신분해방운동을 반영하고, <주례>의 만민평등사상을 받아들여 고려시대의 엄격한 신분제도를 완화하는 개혁이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도 신분은 자유민인 양인과 비자유민인 청민으로 양분되어 있었지만, 양인 안에 특권을 지닌 문벌귀족이 있고 법제적으로는 양인이면서도 실제로는 천역을 지는 신량역천층이 많았다. 한편 천민 중에는 상층 천민인 부곡민과 하층 천민인 노비가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이렇게 복잡한 신분층을 단순화시켜 모든 주민을 양인과 노비로 양분하고, 가능한 한 특권층과 신량역천층을 없애고 노비를 줄이는 정책을 취했다. 고려시대가 부곡민 해방시대라면, 조선시대는 노비 해방시대로 특정 지을 수 있다. 조선초기의 신분개혁은 경제적으로 대지주를 없애고, 중소지주와 자영농을 육성하여 중산층을 확보함으로써 국가재정과 민생을 동시에 안정시키려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노비 중에는 본래 양인이었다가 자급자족이 어려워 노비로 전락한 이들이 많았는데, 태종 떄부터 노비변정도감을 두고 조사를 실시한 결과 수십만 명의 노비가 해방되고, 약 10만 명의 사찰소속 노비가 양인 혹은 공노비로 바뀌었다. 조선초기 총인구는 대략 5백만 명이었는데, 그중의 약 3분의 1 정도가 노비인구로서 고려시대보다 한층 줄어들었다.
노비는 종, 창적, 장획, 천구 등으로도 불렸는데, 공민권이 없어 학교와 벼슬길에 나갈 수가 없었고 노비의 자식은 대대로 노비가 되었으며, 양인과 결혼이 금지되었다. 주인은 노비를 매매, 양도, 상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국역의 의무가 없고, 주인이 모든 가족의 생계를 보장해 준다는 이점도 있었다. 또 노비는 재산을 가질 수가 있고 가족들과 함께 살 수가 있었으며, 주인과 노비 사이에는 임금과 신하의 윤리가 적용되어 주인이 함부로 죽이거나 사형을 내리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었다.
노비 중에서 관청에 소속된 공노비는 두 종료가 있었다. 하나는 외방에 거주하면서 농사를 짓는 납공노비로서, 매년 50%의 병작료 이외에 남자는 무명 1필과 저화 20장, 여자는 무명 1필과 저화 10장을 신공으로 국가에 바쳤다. 또 하나는 기술을 가진 장인으로서 일정기간 관청에 나가서 관청수요품을 제조했는데 이들을 선상노비라고 불렸다. 공노비는 대체로 사노비보다 생활여건이 나았으며 재산축척의 기회가 많았다.
공노비는 유외잡직으로 불리는 하급 기술관직을 가질 수가 있었다. 유외잡직에는 노비뿐 아니라 양인장인과 상인도 임명되었다.
개인이 소유한 사노비는 주인의 집에서 거주하는 솔거노비와 외방에 거주하는 외거노비의 두 종류가 있었다. 솔거노비는 주인집의 행랑채에 가족들과 함께 살면서 여성은 밥 짓기, 빨래하기, 청소하기, 바느질하기 등을 맡았고, 남자는 물깃기, 나무하기, 농사짓기 등을 했다. 이런 일들이 힘들기는 해도 온가족의 의식주를 주인이 해결해 주었다. 흔한 일은 아니지만, 노비 중에는 주인의 사랑을 받아 주인의 재산을 물려받기도 하고, 주인에게 학문을 배워 몰래 과거에 합격하는 일도 있었다. 또 여자는 주인의 첩이 되는 일도 많았다. 중종 때 형조판서를 지낸 반석평은 재상집 가노였는데, 주인의 사랑을 받아 뒤에 속량되어 문과에 급제하고 덕망 높은 관료가 되었다.
외거노비는 밖에 나가 살면서 작개지로 불리는 주인의 땅을 경작하여 수확을 모두 바치고, 주인으로부터 일부 땅을 사경지로 받아 그 수확을 자신이 차지했다. 따라서 외거노비는 주인에게 예속되는 정도가 솔거노비보다 적고, 자기의 독자적인 생활경리를 유지할 수 있었다.
사노비의 주인은 중앙의 관원과 지방의 중소지주인 한량들이었지만, 일반농민 중에도 자영농 이상은 대개 노비를 소유했고, 심지어 노비가 노비를 소유한 경우도 있었다. 노비제도는 물론 악법이지만, 노비가 '선비의 수족'이 되어 농사와 잡일을 거들어준 까닭에 선비들이 공부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교육과 학문발전에 이바지했다고 볼 수 있다.
노비들은 공노비든 사노비든 성을 가진 이가 많았고, 그래서 자기조상을 기억하면서 제사를 지내기도 했다. 조선시대 노비의 지위는 자유민이 아닌 것은 확실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한 노예도 아닌 반자유민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점에서 서양고대의 노예보다는 중세의 농노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2. 양인의 여러 계층
노비가 아닌 사람은 법적으로 모두가 양인으로 간주되어 교육과 벼슬에 나갈 수 있는 공민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대가로 조세, 공납, 요역과 군역의 국역을 질 의무가 있었다. 그러나 양인은 법적으로는 평등하지만 실제로는 경제력과 가문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계층이 존재했다. 양인의 최상층은 문무관원과 그 자손들이었다. 이들을 양반 혹은 사족이라고 불렀다. 지위가 높은 문무관원의 자손에게는 음서, 대가 등의 혜택이 주어졌지만, 그것은 관직세습을 보장해 줄 만한 특권이 되지는 못했고,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원이 되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따라서 누구나 출세하려면 반드시 과거시험을 통과해야 했으므로 개인의 능력이 출세를 좌우했으며, 그런 점에서 양반은 결코 세습적 특권신분이 아니라 부단히 신분이 이동하는 지배계층에 지나지 않았다. 조선왕조가 고려시대보다 한층 개방적인 사회가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야인 중에서 문무관원의 자제 다음으로 신분상승의 잠재력을 많이 지니고 있는 계층은 지방의 중소지주층이었다. 그중에서도 전제개혁에 의해 과전이나 군전을 받은 한량의 출세빈도가 높았다. 이들은 지방사회에서 앞선 경제력을 바탕으로 사족을 자처하면서 학문에 힘써 과거시험에서 높은 경쟁력을 보여 주었다.
한량 다음으로 문무관원으로 올라갈 가능성이 높은 계층은 향리였다. 이들은 고려시대에는 지방사회의 유력층이었으나 조선시대에는 축재를 일삼는 향리를 원악향리라 하여 타지방으로 강제 이주시키는 등 집중적인 견제를 하여 그 세력이 현저히 약화되고 수령을 보좌하는 세습적인 시골아전으로 격하되었다. 그러나 스스로는 사족으로 자부하면서 학문에 힘써 학자와 관원이 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세종 때 예문관 제학을 지낸 윤상 같은 이는 향리출신 학자로 유명하다.
양인 중에서 절대다수를 차지하는 것은 농업에 종사하는 일반 상민이다. 이들은 공민으로서 학교와 벼슬에 나갈 수 있는 권리가 있었고, 전제개혁으로 생활조건이 개선되어 약간의 노비를 거느리는 자영농 이상이면 공부를 열심히 하여 과거시험에 응시하는 일이 불가능하지 않았다.
물론 가난한 영세농이나 병작인들은 출세에 어려움이 컸다. 또 문과에 응시하지 않더라도 하급기술직이나 무반으로 나가는 길은 넓게 열려 있었다. 그래서 '사는 농에서 나온다'든가, '사와 농은 조정에서 벼슬한다'는 말이 널리 유행했다. 이를 사농일치라고도 한다.
양인 중에서 장인이나 상인들은 과거응시에 필요한 인문교양을 쌓을 기회가 농민보다 적었다. 그래서 이들에게는 유외잡직이라는 별도의 벼슬체계를 만들어 하급기술직으로 나가는 길이 열어주었다. 그러나 장인과 상인의 직업은 세습이 강요되지 않았다.
이밖에 조선시대에는 서얼이라는 특수계층이 있었다. 양반의 정실부인이 아닌 첩의 아들을 서얼이라고 하는데, 양인여자보다는 여자종이 첩이 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 소생을 차별대우하는 것이다. 또 정실부인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첩을 더욱 차별대우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조선초기에는 서얼을 그다지 차별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얼 중에 개국공신을 비롯한 고관대작이 많이 배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