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의 건국은 귀족정치를 관료정치로 바꾸는 사회혁명을 가져왔고, 이에 따라 귀족정치를 뒷받침하고 있던 불교를 대신하여 성리학이 지배적인 학문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문화혁명이 도래한 것이다. 불교비판에 앞장선 것은 정도전으로, 태조 7년(1398)에 쓴 <불씨잡변>은 동양 최고 수준의 불교비판서로 이름이 높았다. 이를 계기로 승려의 정치참여가 봉쇄되고 승려들은 산간의 종교인으로 돌아갔으며, 성리학정치가 활짝 꽃을 피웠다.
정도전의 뒤를 이어 권근이 성리학을 더욱 발전시켜 <입학도설>, <오경천견록>, <사서오경구결> 등을 저술하면서 성리학은 더욱 학문적으로 뿌리를 내렸고, 세종조 이후에는 김말, 김반, 김구 등 교육기관에서도 성리학을 가르치고, 과거시험에도 시험과목으로 들어갔다. 성리학의 기본경전은 사서(논어, 맹자, 중용, 대학)와 오경(시경, 서경, 주역, 춘추, 예기)이었으며, 이밖에 삼강오륜의 도덕규범을 설명한 <소학>도 중요시되었다.
성리학은 우주질서와 인간질서를 통일적으로 바라보는 학문으로서, 요즘말로 하자면 인문학과 사회과학 그리고 자연과학을 통합시킨 학문체계로서, 사물을 한층 객관적이고 합리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키웠다. 그래서 조선시대가 고려시대보다 한층 합리적이고 민본적이며 과학적인 사회와 문화를 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관학으로 자리잡은 성리학이 한꺼번에 발전한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관료정치와 민본주의를 강조하는 변혁이론으로 받아들였다가, 뒤에는 차츰 선비의 도덕수양을 강조하는 심성론으로 발전하고, 조선후기에는 도덕수양과 국리민복에 대한 경세를 함께 강조하는 실학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 성리학이 지배적인 사상이 되었다 해서 부국강병의 공리와 중앙집권을 강조하는 한·당유학이 금방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초기에는 당태종의 정치를 서술한 <정관정요>가 여전히 왕에게 읽혔으며, 각종 기술학과 무학도 존중되었다. 이는 조선초기에 강력한 국가건설과 민생안정이라는 양면의 과제를 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리학을 도덕수양의 측면에서 생각하는 인사들은 조선왕조개국에 반대하고 성리학은 재야의 학문으로 발전하다가 16세기경부터 다시 두각을 나타내어 사림으로 등장했다. 이들은 고려말 정몽주를 높이 추앙하면서 공리와 부국강병을 배격하고 기절과 의리를 존중하고, 향촌 선비의 정치적, 사회적 자율성을 강조했다. 이들은 고려말부터 <주자가례>를 도입하여 집에 가묘를 세우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이런 학풍은 특히 정몽주나 길재와 같은 절신들의 연고지인 영남지방에 두드러졌는데, 선산의 김숙자와 김종직 부자가 많은 후학을 길러내면서 15세기말에는 뚜렷한 정치세력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15세기 관학파 성리학이 한·당유학을 절충하여 국가건설에 공헌했다면, 재야의 사림파 성리학은 선비의 도덕수양과 향촌사회 안정에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