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교육제도
<논어>의 첫 구절은 '배워서 때에 맞추어 실천하니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로 되어 있다. 인생의 즐거움 가운데 가장 큰 즐거움이 배움이라는 것이다. 한국인은 예부터 교육열이 높았지만, 조선은 특히 유교국가였고 교육을 강조하는 유교이념에 따라 교육열기가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출세하려면 공부해야 한다는 생활철학이 뿌리를 내렸다. 조선초기의 교육은 문, 사, 철 등 인문학만을 강조한 것은 아니었다. <주례>의 정신을 받아들여 기술학도 존중했다.
먼저, 인문교육기관으로 전국의 모든 군현에 향교를 설치하여 국비로 가르쳤다. 고려시대에는 주요 군현에만 향교가 있었으나 조선시대에는 모든 군현에 향교가 세워졌다. 학교진흥은 수령의 7사 가운데 하나가 될만큼 중요시되었다. 향교에는 양인 이상의 신분으로서 준수한 재능을 가진 남자가 입학하여 교생이 되었다. 교생의 정원은 군현의 인구비율로 정해져 있었는데, 교생들은 여름 농번기에는 방학을 맞아 농사를 돌보고, 가을에 추수가 끝나면 기숙사인 재에 들어가 기거하면서 <소학> 4서, 5경 등 유학경전을 공부했다. 매년 두 번씩 시험을 치러 우등자는 생원, 진사시험의 초시를 면제해 주고 성적미달의 낙강생은 군역을 지도록 했다.
한편, 서울에도 네 군데에 학교를 세워 이를 부학이라 했는데 서학, 동학, 남학, 중학이 그것이다. 부학의 정원은 각 100명이며, 교육내용은 향교와 같았다.
향교와 부학을 다닌 학생들은 유학으로 불리면서 사회적 존경을 받았고, 과거시험에 응시할 자격이 주어졌다. 그 중에서 생원과 진사가 된 사람은 문과에 다시 응시하거나 직접 낮은 관직을 얻기도 했으나, 더 높은 학문을 원하는 사람은 최고학부인 서울의 성균관에 입학했다. 성균관의 정원은 생원, 진사 각 100명씩 모두 200명이었다. 성균관 유생은 성적이 우수한 자는 문과의 초시를 면제해 주고 직접 2차 시험인 복시에 응시할 자격을 주었으며, 또 50세까지 착실하게 공부한 학생은 과거를 치르지 않아도 벼슬을 주는 일이 있었다.
향교와 성균관에는 강당이 있고, 기숙사인 재가 강당 앞 좌우에 있어 이를 동재와 서재로 불렀다. 그리고 강당 뒤에는 문묘를 두어 공자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성균관에는 존경각이라 불리는 도서관이 있었다. 왕세자도 일단 성균관에 들어가 입학식을 치르고 나서 궁안의 시강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조선초기에는 국비로 운영되는 관학이 우세했지만 16세기 이후로는 지방의 사족들이 자기 고을에 세운 서원이 점점 늘어나 사학과 관학이 경쟁하는 시대가 열렸다. 서원의 구조와 교육내용은 향교와 비슷했지만, 사당에 모신 선현이 서원마다 달라서 독특한 학풍을 이루고 있었다. 서원에 입학한 학생은 학비를 스스로 부담했다.
향교와 서원이 대체로 군현을 단위로 설치된 교육기관이라면, 군현 밑의 마을을 단위로 설치된 초등교육기관인 서당이다. 서당에서는 <천자문>을 비로샇여 초보적인 유교경전을 가르쳤다.
여성들은 학교에 입학할 자격이 없었으나, 사족부녀자들은 집에서 가정교사를 두거나 부모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출판인쇄문화의 발달로 서책이 널리 보급되면서 교육진흥에 박차가 가해졌다.
한편 기술교육은 잡학이라 불렀는데, 이를 해당 기술관청에서 직접 교육을 담당했다. 중국어, 몽고어, 여진어, 일본어는 사역원에서, 의학은 전의감과 혜민서에서, 천문, 지리, 명과, 도학은 관상감에서, 산학은 호조에서, 유학은 형조에서, 화학은 도화서에서 각각 관청했다. 의학과 율학은 모든 지방군현에서도 가르치고, 외국어는 이용하는 지역의 특성을 고려하여 학학과 여진학은 주로 평안도에서, 왜학은 경상도 삼포에서 각각 가르쳤다.
잡학생의 정원은 중앙이 285명, 지방이 약 6천 명이었으며 평민자제들이 주로 이를 배웠으나, 의학과 역학은 양반자제들도 많이 배웠다. 조선초기에는 잡학에 대한 천시가 비교적 적어 잡학출신자 중에도 고관이 배출되는 경우가 있었다.
2. 선거제도
교육진흥은 유능한 인재를 기르치 위한 것으로 관리를 선발하는 기준도 능력주의가 존중되었다. 조선시대 인재등용의 대원칙은 입현무방과 유재사용이었다. 즉 '어진사람을 등요함에 있어서 지방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과 '오직 재주 있는 사람을 등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원칙에 따라 고려시대 성행했던 음서의 범위가 축소되고, 고시제도와 천거제도가 발달했다. 이 둘을 합쳐 선거라고 불렀다.
시험제도, 즉 고시는 생원진사과, 문과와 무과 그리고 잡과 등이 있었고, 그 밖에 간단한 시험을 치러 하급관원을 선발하는 취재도 널리 성행했다. 경학에 뛰어난 인재를 선발하는 생원과 문학적 재능이 뛰어난 인재를 뽑는 진사과는 3년마다 각각 100명씩 선발했다. 이를 소과 혹은 사마사라고도 불렀다. 생원과 진사가 되면 바로 하급관원이 되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문과에 다시 응시하거나 성균관에 진학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사마시는 1차 시험인 초시에서 7 배수를 뽑았는데, 이는 각 도의 인구비율로 강제 배분되었다. 그러나 2차 시험인 복시에는 도별 안배를 없애고 성적순으로 뽑았다. 그리고 합격자에게는 흰 종이에 쓴 합격증을 주었는데 이를 백패라고 한다.
고시 중에서 가장 경쟁률이 높고 비중이 큰 것은 고급문관을 선발하는 문과 였다. 문과는 3년마다 선발하는 정기시험과 수시로 시험하는 별시, 증광시, 임금이 성균관에서 문묘를 배알하고 치르는 알성시 그리고 국가의 경사가 있을 때 시행하는 경과 등이 있었다. 정기시험에는 1만 명 이상의 지원자들이 경쟁을 벌여 최종적으로 33명을 뽑는데, 초시에서 7 배수인 240명을 각도의 인구비율로 뽑았다. 그러나 2차 시험인 복시에서는 도별 안배를 없애고 성적순으로 33명을 뽑았으며, 궁궐에서 치르는 3차 시험인 전시에서는 갑과 3인, 을과 7인, 병과 23인의 등급을 정하여 그 등급에 따라 최고 6품에서 최하 9품의 품계를 받았다. 현직관원인 경우에는 현재의 직급에서 1~4계를 올려주었다.
과거시험은 선비들이 출세하는 최고의 등용문으로서 과거보러 가는 것을 관광이라고 했으며, 문과합격자에게 주는 합격증서는 붉은 종이에 써서 이를 홍패라고 불렀다.
생원, 진사시에는 유학이 응시하고 문과에는 유학, 생원, 진사 혹은 현직관원이 응시했다. 노비를 제외한 양인으로서 학교교육을 마친 사람은 누구나 응시가 가능했지만 반역죄인이나 탐관오리의 아들, 재가한 여자의 아들과 손자 그리고 서얼은 응시가 불가능했다.
무반을 뽑는 무과는 3년마다 28명을 뽑았다. 기술관원을 선발하는 잡과는 3년마다 역과 19명, 의과 9명, 음양과 9명, 율과 9명 도합 46명을 뽑았는데, 이 중에서 음양과의 천문학은 천문학을 전공하는 생도들만이 응시할 수 있었으나, 다른 과는 교생이나 부학생들도 응시할 수 있었다. 잡과 합격자는 해당 기술관청에 근무하여 최고 3품까지 승진할 수 있었으나, 다시 문과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3품 이상의 진급도 가능했다. 실제로 기술관원으로서 문과에 합격하여 고급관원이 된 예가 적지 않다.
한편 관리채용방법의 하나로 천거제도가 있었다. 이는 학문이 높으면서도 초야에 묻혀 있는 인재를 발탁하기 위함인데, 대개 3품 이상의 고관이 천거권을 가지고 있었으며 천거된 사람은 간단한 시험을 치른 후 관직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천거된 자가 죄를 지으면 천거한 사람도 함께 벌을 받게 되어 아무나 함부로 천거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