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업의 발전
왕조개창을 전후하여 왜구가 토벌되면서 연해안지역 개발이 촉진되고, 전제개혁에 의해 농민의 생산의욕이 높아졌으며, 의학발달로 인한 인구증가와 국가의 적극적인 관농정책 그리고 사대부층의 영농법연구가 합쳐져 농업생산력이 크게 향상되었다.
농업생산력을 높이려면 땅을 기름지게 만드는 시비법이 중요한데, 콩과 녹두를 심었다가 갈아엎고 썩혀서 비료로 쓰는 녹비법이 개발되고, 인분과 재를 거름으로 쓰기도 하면서 땅의 비옥도가 높아졌다. 고려시대만 해도 땅의 비옥도가 낮아서 1년씩 걸러서 농사를 짓는 휴한지가 적지 않았으나 조선시대에는 밭에서 조, 콩, 보리의 2년 3작이 이루어지고, 논에서는 벼와 보리의 이모작이 가능한 지역이 늘어났다.
원래 우리나라는 비가 많은 편이 아닌 반건 기후로서 논보다는 밭이 두 배 이상 많았으나, 하천을 막아 보를 쌓는 등 수리시설이 개선되면서 15세기에는 전국에 3천여 개의 저수지가 생겨났으며, 수차를 이용하여 저수지물을 논에 관개하는 기술도 개선되었다. 그 결과 벼를 재배하는 논이 전보다 한층 많아졌다.
벼농사는 봄에 마른땅에 씨를 뿌렸다가 일정한 정도로 벼가 자라면 물을 대주는 건사리법이 널리 유행했는데, 조선초기부터는 물논에 직접 씨를 뿌리는 물사리법과 묘가 자란 다음에 묘를 다른 곳에 옮겨 심는 이양법도 병행되었다. 이양법은 비가 많은 남부지방에서는 전에도 있었으나 그 지역이 중부지역으로 확대되었다. 이양법은 풀 뽑는 노동력이 절감되고, 두 곳의 지력을 이용하여 생산을 높이는 장점이 있었으나, 이양철에 물이 부족하면 큰 타격을 입는 약점이 있어서 수리시설의 보완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벼품종도 많이 개량되었다. 지금의 경기도 시흥인 금양에 살던 강희맹의 <금양잡록>에 의하면 당시 경기도에서 21종의 벼가 재배되었는데, 그중에는 파종 후 50일 만에 수확하는 것도 있고, 바람에 강한 품종이 14종이나 소개되어 있다. 이 밖에 조, 콩, 보리, 기장, 피, 수수 등 여러 종류의 곡식이 재배되고 있었다.
2. 수공업의 발전
조선초기에는 개인수공업과 관청수공업이 있었는데, 후자가 우세했다. 고려말의 개인수공업자와 소 혹은 사원에 소속된 수공업자들을 공장안에 등록시켜 서울과 지방의 각 관청에 소속시키고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조하게 했다. <경국대전>에 의하면 서울에 소속된 경공장은 2,800여 명으로서 30개 관청에서 129종의 일을 맡았다.
공장이 가장 많이 배속된 관청은 무기를 제조하는 군기사, 의복을 제조하는 상의원, 음시고가 그릇을 만드는 사옹원, 토목공사를 맡은 선공감, 서적을 출판하는 교서관, 종이를 만드는 조지서 등이며 여기서 만드는 무기, 의복, 그릇, 건축, 문방구, 활자, 종이 등이 특히 우수했다. 한편, 지방관청에 소속된 외공장은 3,500여 명으로서 27종의 직종이 있었다. 이 중에서 인원이 가장 많은 것은 지장이고 그다음에 야장, 석장, 시인, 목장, 피장, 칠장, 궁인의 순이다.
궁중의 사치를 막기 위해 종전에 쓰던 금이나 은그릇을 추방하고 그대신 도자기를 썼기 때문에 조선시대 도자기는 생산량이 많고 품질이 우수했다. 도자기 가마는 전국에 325개소나 되었는데, 특히 사옹원 분원이 있는 경기도 광주와 경상도 고령의 생산품이 최고급으로 인정받았다.
고려말부터 제조되기 시작한 화약무기도 더욱 개량되었는데, 특히 완구를 비롯한 대포의 성능이 우수하여 궁중에서 외국사신을 불러놓고 야간에 실험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대포의 위력에 놀란 사신들은 이를 가르쳐 달라고 조르는 일이 많았다.
3. 상업의 발전
조선초기에는 무본억말 정책을 써서 산업의 근본인 농업을 일차적으로 장려하고, 상업은 말업으로 간주하여 어느 정도 견제했다. 이는 상업을 없애기 위함이 아니라 농민들이 농토를 버리고 상업에 뛰어드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농업과 수공업이 발전하면서 상품유통도 자연스레 활발해졌다.
상업은 아무래도 인구가 많은 도시에서 발달했다. 인구가 10만을 헤아리는 서울은 상업의 중심지였다. 태종 때 가장 교통이 편한 서울의 중심가인 종로와 남대문에 이르는 광통교 길가에 2,600여 칸에 달하는 연쇄상가로서 시전을 조성하여 상인들에게 대여했다. 시전은 한 상점에서 한 가지 물건만을 전문적으로 팔게 하여 독점판매권을 부여하고, 그 대신 국가에 공랑세를 바치고 국역의 형태로 궁중과 관청에서 필요로 하는 물품을 조달할 의무가 있었다. 물가와 도량형도 경시서에서 관할하여 폭리를 막았다. 말하자면 시장경제와 통제경제의 혼합형이라 할 수 있다. 시전과 비슷한 성격의 상가는 개성, 평양, 전주와 같은 대도시에서도 있었다. 서울의 시전은 16세기 이후로 명주, 종이, 어물, 모시, 삼베, 무명을 파는 여섯 개 상점이 가장 번성하여 이를 육의전이라고 불렀다.
농촌에서는 보부상이라 불리는 봇짐장수가 자질구레한 일용잡화와 소금, 물고기, 그릇, 문방구, 책 등을 가지고 다니면서 팔았다. 대체로 농민들은 쌀과 무명을 주고 물건을 사는 것이 관례였다. 국가에서는 닥나무 종이돈인 저화와 구리돈인 조선통보를 발행했으나, 도시를 제외한 시골에서는 실물가치가 있는 무명을 화폐대용으로 많이 사용하여 이를 포화라고 불렀다.
조선왕조는 의식주의 자급자족이 가능했으므로 외국과의 교역의 필요성을 그다지 느끼지 않았다. 그러나 의식의 자급자족이 어려운 일본과 여진족이 교역을 원해 여진과는 국경지역에 설치한 무역소인 책문후시를 통해, 일본과는 동래의 왜관을 통해 물화를 교역했다. 식량과 농기구, 옷감 등이 주로 밖으로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