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초기의 경제구조는 민생안정과 더불어 국가수입을 증대시켜 안정된 재무국가를 만드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양입위출, 즉 국가수입을 헤아려 일부를 저축하고 나머지를 국가 및 왕실경비로 지출했는데, 세조 때부터는 지출을 먼저 정하고 그에 따라 수입을 정하는 회계제도를 도입했는데 이를 횡간이라고 했다. 국가의 지출은 관원의 녹봉, 국가의 제사, 군량미, 의료비, 빈민구제비 등에 지출되었다.
국가수입의 중심을 이루는 것은 전조와 전세, 공납 그리고 군역이었다. 먼저 전조는 공전에서 1결당 최고 30두를 받는 것으로 이는 대략 수확의 10분의 1을 표준으로 한 것이다. 그러나 흉년이 들면 그 정도에 따라 세액을 낮추었다. 10분의 1세는 고려시대에 비해 현저히 낮아진 것이지만, 고려말 이후로 전제개혁과 양전사업 그리고 조선초기 지속적인 해안지역의 토지개간 결과 고려말에 약 60~80만 결이던 토지가 태종 때는 120만 결, 세종 때에는 172만 결로 늘어났는데 경기도 땅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두 공전에 편입되었으므로 국가수입이 크게 늘어났다.
한편, 관원들에게 지급한 과전을 비롯한 사전에서도 일정한 전세를 받아냈다. 그 결과 전조와 전세를 합친 1년의 총수입은 약 60~100만 석에 이르고, 이 수량은 국가의 1년 총경비와 거의 비슷했다. 그러나 국가수입은 이밖에도 가호마다 받는 공납 그리고 시전상인과 수공업자로부터 받는 상인세와 장인세 등이 있었다.
조선정부는 농민부담의 경감과 공평과세를 위해 세종 26년(1444)에 공법을 시행했다. 그 결과 토지의 비옥도를 6등급으로 나누고 풍흉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누어 전조를 부과했는데, 1결당 최고 20두에서 최하 4두로 낮아졌다. 이 시기 1결의 생산량은 최고 1,200두에서 최하 400두로 높아져 있었으므로 전조의 부담은 더욱 지출하고도 여유가 많았다. 15세기의 국방력 강화와 문화의 융성은 이러한 재정적 여유가 바탕이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비축곡식이 갈수록 줄어들어 16세기 중엽 중종 때에는 2백만 석, 16세기말 선조 때에는 50만 석으로 줄어들어 국가재정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었다.
농민이 국가에 바치는 조세는 강가나 바닷가의 조창에 모았다가 해로를 통해 서울로 운반되었는데, 경상도는 낙동강과 남한강을 이용했으며 평안도와 함경도의 조세는 서울로 운반하지 않고 각기 그곳이 사신접대와 군사비로 썼다.
15세기에는 전제개혁의 결과로 농민의 자립도가 전보다 높아졌다. 당시 양인호구를 50만~60만 호로 볼 때, 매호 당 평균 3결 정도를 보유한 셈인데, 실제로 국가에서는 3~4결의 토지를 가진 농민을 표준적인 자립농으로 간주하여 이들에게는 군역을 지는데 필요한 보조원을 지급하지 않았다. 물론, 농민의 대다수는 1~2결의 토지를 가진 영세농이었지만, 남의 토지를 빌어 경작하는 병작농보다는 자기 토지를 보유한 자작농이 더 많았다. 이는 전제개혁의 결과로 많은 병작농이 자작농으로 상승한 까닭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에 유행했던 차경의 관행이 법으로 금지되었다. 즉, 많은 토지를 가진 세력가가 힘없는 농민을 불러들여 토지를 경작시키고 반 이상의 수확을 거두어가던 경제외적 수탈은 금지되고, 이것이 발각되면 그 토지를 몰수하여 통민에게 주었다. 그 대신 3~4결 이하의 토지를 가진 과부, 홀아비, 고아, 독자 등 노동력이 없는 사람이 이웃이나 친척에게 병작을 주는 것은 허용되었다. 이 경우 지주와 작인은 수확의 반을 서로 나누었지만 경제외적 강제가 존재하기는 어려웠다. 병작이라는 말은 '어우리', 즉 '지주와 작인이 힘을 합쳐서 농사를 한다'는 수평적 관념이 들어 있었다. 차경에서 병작으로 바뀐 것은 지주와 작인 관계가 수직관계에서 수평관계로 바뀐 것을 의미한다. 요즈음 우리가 쓰는 소작이라는 말은 일제강점기에 들어온 것이다.
조선초기 농민은 토지세인 전조 이외에 가옥세인 공납과 인두세인 요역도 함께 부담했다. 그 중에서 전조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세종 때 공법이 시행되면서 부담이 크게 되었다. 요역은 8결작부라 하여 8결마다 장정 1명씩을 내어 국가의 각종 토목공사와 공물운반에 무상으로 동원되었다. 그러나 1년에 원칙적으로 6일을 넘기지 못하게 되어 있었다.
공납은 각 지방의 특산품을 바치는 것으로 처음에는 물건을 직접 바치다가 수요와 공급이 서로 맞지 않아 뒤에는 관청에서 필요한 물품을 미리 사들여 쓰고 나서 농민에게 대가를 받아내는 방납이 관행으로 되었다. 그런데 방납이 너무 과도하여 농민에게 가장 큰 부담이 되었으며, 이를 시정하기 위해 17세기에 가서 쌀로 받게 된 것이 대동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