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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체제의 재편성 - 관료기구의 재정비

by 스톤나인 2024. 9. 22.

1. 중앙통치기구

조선왕조는 개국 직후부터 고려와 다른 독자적인 통치규범을 만들고 이를 표준으로 하여 한층 진보된 정치를 운영했다. 최초로 통치규범을 만든 이는 개국공신 삼봉 정도전으로서 그는 중국의 이상적인 정치규범인 <주례>를 참고하여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을 편찬했는데, 이를 모체로 하고 그 후 시행된 법규를 참고하여 성종 5년(1474)에 만세불변의 헌법을 만든 것이 <경국대전>이다.

 조선왕조 권력구조의 특색의 군신공치의 이념 아래 권력분산과 권력견제에 역점을 두어 정치의 공정성과 투명성을 높이고, 백성을 나라의 근본으로 존중하는 민본정치를 구현하는 데 목표를 두었다. 그리하여 고려시대에 왕권을 제약하고 있던, 2품 이상 재상들의 합의기관인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대간들이 가지고 있던 모든 관리에 대한 임명동의권인 서경권을 약화시켜, 5품 이하 관리의 임명에만 동의권을 갖도록 제한하여 상대적으로 왕권을 강화했다.

 그러나 조선의 왕권은 공권이 강화된 것이지, 사권은 오히려 크게 위축되었다. 즉 왕권은 제도의 테두리 안에서 공권을 행사할 뿐 이를 넘어서는 일은 자유롭지 못했다. 국왕의 일거일동은 사관에 의해 낱낱이 기록되어 철저한 감시 속에 투명한 정치가 이루어지도록 제도장치가 짜였다.

 국왕은 관념적으로 무제한의 권한을 갖지만 실제로는 인사권과 반역자를 다스리는 권한을 행사할 뿐, 중요한 정책은 신하들과 국무회의를 열어 결정했다. 매일 국왕이 편전에 나아가 의정부, 6조 그리고 국왕을 측근에서 보필하는 시종신인 홍문관, 사간원, 사헌부 예문관, 승정원 대신들과 만나 토의하고 결정했다. 이를 상참이라고 한다.

 이밖에 매일 5명 이내의 6품 이상 문관과 4품 이상 무관을 관청별로 교대로 만나 정사를 논의하는 윤대, 매달 여섯 차례 의정부 의정,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고급관원과 전적대신들을 만나 정책건의를 듣는 차대 등이 있어서 여러 종류의 국무회의가 있었다.

 국왕 다음의 최고권력기관은 의정부였다. 이는 중국에 없는 조선 독자의 관청으로서 여기에는 정1품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등 세 의정이 있고, 그 밑에 종1품의 좌찬성과 우찬성 그리고 정2품의 좌참찬과 우참찬 등 7명의 재상이 속해 있었다. 특히 의정은 예문관, 홍문관, 승문원, 춘추관, 관상감 등 주요 관청의 최고책임을 겸임하게 하고, 국왕을 교육하는 경연과 세자를 교육하는 서연의 책임을 맡고, 의정부 밑에 행정집행기관으로 정2품 관청인 6조를 소속시켜 의정부가 모든 관원과 행정을 총괄하는 형식을 취했다. 의정부 다음으로 위상이 높은 것은 종1품 관청인 의금부였는데, 의금부는 왕명에 의해서만 반역죄인을 심문할 수 있어서 왕권을 유지하는 중요한 권력기구였다.

 6조에는 장관인 관서를 비롯하여 참판, 참의, 정랑, 좌랑 등의 관원이었는데, 주요 실무는 오늘날 과장급인 정랑과 좌랑이 맡았다. 특히 이조와 병조의 정랑과 좌랑은 각각 문관과 무관의 인사권을 가지고 있었다.

 의정부와 6조가 통치의 실권을 가진 관청이라면, 여기서 이루어지는 정책을 감시, 비판하고 정책을 건의하는 관청이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 등이었다. 이 중에서 사헌부는 관원의 비행을 감찰하는 사법기관이고, 사간원은 정책을 비판하는 간쟁기관이며, 홍문관은 공중도서를 관리하면서 국왕의 교서를 작성하고 경연을 주도하는 학문기관이었다.

 그런데 사헌부와 홍문관은 사간원과 더불어 정책을 비판하는 기능도 겸하여 이를 언론삼사라고 불렀다. 실제로 삼사의 언론은 국왕의 전제를 막는 데 큰 역할을 담당했다. 삼사가 합동으로 요청하여 왕비와 종친의 생사를 좌우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여 조선왕조는 권력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비상하게 발달한 시대였다.

 조선왕조는 관료제도의 합리적인 운영을 위한 몇 가지 제도장치가 마련되었다.

 첫째, 상피제를 두어 부자나 형제가 같은 관청에 근무하지 못하게 하고, 수령이 자기 출신지역에 부임하지 못하며 친족이 과거에 응시할 때에는 고시관이 될 수 없었다.

 둘째, 왕의 종친이나 부마는 원친적으로 관직에 나갈 수가 없고, 왕은 사유재산을 가질 수 없었다. 그 대신 왕실경비와 정부경비를 구분하지 않고 통일시켜 궁부일체의 재정구조를 만들었다. 이는 왕을 철저한 공인으로 만들어 사적인 인맥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 원칙은 초기에는 비교적 잘 지켜졌으나 뒤에는 내수사라는 관청을 두어 왕실의 사유재산이 늘어나 문제가 되기도 했다.

 셋째, 관료승진에 있어 고과제를 엄격하게 하여 무능한 자를 도태시키고 능력 있는 자를 우대했다. 

2, 지방행정

조선왕조의 지방행정도 새롭게 개편되었다. 우선 전국의 주민을 중앙정부가 일원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전국 모든 군현에 수령이 파견되었다. 고려시대는 수령이 파견되지 못한 속현이 많아서 국가의 공권력이 전국에 골고루 미치지 못하여 지방 토호들이 마음대로 백성을 지배하는 일이 많았다. 수령은 임금의 분신으로서 지방의 행정, 사법, 군사권을 장악하고, 그 공권력을 바탕으로 농업발전, 교육진흥, 부세수취, 치안확보 등 일곱 가지 임무를 수행했는데, 이를 수령 7사라 한다.

 수령의 지방통치는 지방민의 생활을 전보다 안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수령은 자기 출신지역에는 부임하지 못하나, 수령의 비행을 염려하여 각 도에 관찰사를 상근직으로 파견하여 수령의 업무성적을 평가하여서 승진시키거나 퇴출시켰다.

 수령이 파견된 군현 밑에는 면, 리, 통을 두어 다섯 집을 1통으로 편제하고, 지방민 중에서 통주, 이정, 면장을 선임하여 수령의 명령을 집행하게 했다. 이들은 인구파악과 부역징발이 주된 임무였다.

 고려시대에 지방사회의 세력가로서 중앙관직으로 진출하던 향리는 조선에 들어와 수령의 행정실무를 보좌하는 세습적인 아전으로 지위가 격하되었는데, 중앙의 6조를 본따 6방으로 나누어 실무를 맡았다.

 한편, 중앙집권 강화와 아울러 지방민의 자치를 허용하기 위해 각 군현에 유향소를 설치했다. 여기에는 덕망 있는 지방인사들이 모여 좌수 혹은 별감을 선출하여 자율적으로 규율을 만들고, 수시로 향회를 소집하여 여론을 수렴하면서 백성을 교화하고 수령의 비행을 관찰사에게 보고하기도 했다. 말하자면 유향소는 지방의회와 비슷한 기능을 가졌다. 또 서울에는 경재소를 두어 지방 유력자를 근무케 하여 유향소와 정부 사이의 연락관계를 긴밀하게 하고, 유향소를 중앙에서 통제할 수 있게 했다.

 조선시대는 전국을 8도로 나누고, 8도에 약 350개 내외의 군현을 두었다. 전국을 8도로 나눈 것은 조선왕조가 오행의 덕목을 취했으므로, 목덕의 숫자인 8을 선택한 것이다. 또, 350이라는 숫자는 왕이 하루에 한 군현을 다스리면 1년에 전국을 모두 다스릴 수 있다는 계산이 깔려 있었다. 고려시대의 특수 행정구역이던 향, 소, 부곡은 모두 해방되어 일반군현으로 편입되어서 노비를 제외한 천민이 없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