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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의 문화 - 훈민정음의 창제

by 스톤나인 2024. 10. 7.

 우리나라는 예부터 한문을 쓰면서 중국의 고급문화를 수용해 왔으나, 언어와 문자의 불일치와 한문공부의 어려움 때문에 국문자의 필요성을 항상 느껴왔다. 그래서 고대로부터 고전 혹은 신지문자로 불리는 태고문자를 만들었으나 정밀한 체계를 갖추지 못한 원시적 문자로 머물렀다.

 그러다가 조선개국 후 민족의식이 높아지고 민본사상이 발달하면서 백성들이 배우기 쉬운 우리 문자를 만들어 국가의 통치이념을 백성들에게 직접 전달할 필요성이 커졌다. 다만, 훈민정음이 세종 때 창제된 것은 집현전을 통해 동양의 전통문화를 깊이 있게 연구하는 과정에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 몽고, 일본 등 동양 각국의 언어와 문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고, 성리학의 발달에 따라 음양오행의 원리를 문자조직에 응용할 안목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은 이렇듯 조선초기 역사발전의 산물로서 창작된 것이지만, 그것을 직접 창작한 것은 세종과 문종을 비롯한 왕자들이었으며, 세종 25년(1443)에 반포된 후 정인지, 신숙주, 성삼문, 최항, 박팽년 등 집현전 학자들이 훈민정음을 해설하는 역할을 맡았다.

 1940년에 발견된 <훈민정음해례>에 의하면, 훈민정음의 문자모양은 발음기관과 천지인의 모습을 닮고, 문자조직은 역철학의 원리를 응용한 것으로 되어 있다. 훈민정음은 이러한 철학적 기초 위에서 만들어져 그 원리가 과학적이고 그 조직이 오묘할 뿐 아니라, 변화무쌍한 우리말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고, 어떤 나라 말의 발음인지 거의 원형에 가깝게 표현할 수 있다. 이런 특성을 가진 문자는 세계문자사상 유례를 찾기 어렵다. 그런 점에서 한글은 세계적인 문자가 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훈민정음은 훌륭한 글자이지만, 실제로 그 쓰임은 한문생활을 보조하는 기능에 머물렀다. 우리말의 어휘 속에 한문성어가 깊이 침투하여 국문만으로는 의사전달이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욱이 한문은 동아시아 각국에서 공용문자로 이미 뿌리를 내리고 있었으므로 문화교류의 필요상 한자를 버릴 수 없었다.

 훈민정음은 창제된 후 크게 네 가지 방향에서 이용되었다. 첫째는 한문책을 국문으로 풀이하여 백성들에게 널리 읽히는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용비어천가>, <월인천강지곡>, 그밖에 여러 불경들이 세종~세조 때에 걸쳐 번역되었고, 16세기에는 사서를 비롯한 유교경전과 농업과 관련된 과학기술 서적들이 번역·출간되었다. 훈민정음을 언문으로 부른 이유가 여기에 있다. 둘째, 행정실무를 맡은 서리들이 훈민정음을 익혀 한문을 모르는 일반백성들에게 국가시책을 이해시키는데 이용되었다. 셋째, 궁중여인을 비롯한 여성층의 문자생활이 활발해지는 계기가 되었다. 넷째, 한문이해가 깊은 유학자들도 시가와 산문을 국문으로 창작하는 사례가 나타나고, 한문을 모르는 평민과 부녀자층에서도 문학창작이 가능해졌다. 또, 국문창제는 우리말을 더욱 세련되고 풍부하게 발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마지막으로 훈민정음의 또 하나의 공헌은 한자의 발음을 우리 현실에 맞게 바로 잡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동국정운>과 <홍무정운훈해>는 그러한 노력의 결과로 나타난 음운서이다. <동국정운> 서문에는 우리나라의 풍토와 기후가 중국과 달라 성음이 서로 같을 수 없다는 주체적 입장이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