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음악과 무용
예와 악은 유교정치에서 백성을 교화시키는 수단으로써 중요하게 여겼으며, 각종 국가의식에는 반드시 음악이 따랐다.
조선초기에는 음악을 관장하는 장악원이 있어서 양인출신의 악생이 아악을 담당하고, 공노비 출신의 악공이 속악을 연주했다. 음악이 크게 정비된 것은 세종 때로서 박연 등이 노력하여 60여 종의 악기를 개량하고, 주나라에 가장 가까운 독자적인 아악을 수립했다. 장악원에서 연주하는 악곡은 국가와 백성의 평안을 기리는 것들이 대부분으로서 <여민락>, <정대업>, <보태평>, <낙양춘>, <오관산> 등 수십 곡이 연주되었다. 악공 중에서는 특히 명연주자가 많이 나왔는데 비파의 송태평, 거문고의 김자려, 가야금의 이승련, 아쟁의 김소재 등이 대표적인 음악인이다.
악보정리에 있어서도 큰 진전이 있었다. 세종은 스스로 <여민락> 등 여러 악곡을 만들고, 또 정간보라고 불리는 새로운 악보를 창안하여 처음으로 소리의 장단을 표시하는 악보가 생겼다. 한편 성현은 연주법과 악곡을 합친 <합자보>를 만들어 기악 연주 수준을 높였다.
음악이론에 관한 책으로는 성종 24년(1493)에 유자광, 성현 등이 편찬한 <악학궤범>이 대표적이다. 이 책은 음악을 아악, 당악, 향악으로 구분해 음악의 원리와 역사, 악기편성법, 음악 쓰는 절차, 악기 만드는 법과 그 조현법, 춤의 진행방법, 의상과 도구 등을 집대성한 것이다. 이 책에는 <정읍사>, <동동>, <처용가> 등의 노래가 한글로 수록되어 있기도 하다.
음악이 있으면 춤이 따랐다. 그래서 음악이 정비되면서 춤도 정비되었는데, 춤은 무동으로 불리는 소년이나 기생이 추었으며 춤의 종류로는 <보태평>, <정대업>, <절화삼대>, <학춤>, <처용춤> 등이 있었다. 또 궁중에는 나례청이라는 임시관청이 있어서 잡귀를 몰아내는 가면극인 나례를 연말행사로서, 또는 외국사신을 위해 자주 연출하기도 했다.
2. 종교
조선왕조는 유교국가로서 불교나 도교 혹은 무속을 이단으로 배척했으나, 불교 및 도교와 연관된 풍속을 일거에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이단의 극심한 사회적 폐단은 개혁했으나, 민족 문화로서의 순기능과 종교적 기능은 용납하여 관용하는 정책을 썼다. 말하자면 종교개혁을 단행한 것이다.
먼저, 불교에 대해서는 태종-세종대에 걸쳐 난립된 여러 종파를 교종과 선종의 두 종파로 통합하고 사찰 수를 대폭 줄였으며, 수만 결의 사찰토지와 수십만의 사찰노비를 몰수하여 공전과 공노비로 귀속시켰다. 그리고 승려가 되려면 <심경>, <금강경>, <능엄주>를 암송하는 시험을 치르고 나서 국가에 무명 30필을 정전으로 바쳐야 승려신분증인 도첩을 내려주었다. 또 승과는 선종인 경우 <전등>과 <점송>을, 교종은 <화엄경>과 <십지론>의 시험을 통해 3년마다 교종 30명, 선종 30명의 합격자를 뽑아 승직을 주고 주지에 임명했으며, 임기는 30개월로 제한했다.
이렇게 사찰과 승려에 대해서는 억압정책을 썼으나, 국가와 왕실의 안녕과 번영을 기원하는 불교행사는 자주 거행했다. 즉 불교의 역기능은 개혁하고, 그 종교적 순기능은 살려낸 것이다. 특히 남성위주의 성리학문화에 익숙하지 못한 궁중여인이나 양반부녀자들은 불교의 종교적 기능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넓혀가고 종서적 갈등을 해소시켰다. 그리하여 세종 때에는 <대장경>을 다시 인출하고, 세조 때에는 간경도감은 두어 많은 불서를 국문으로 번역·간행했다. 왕실불교가 유지됨에 따라 승려로서 정치에 영향을 주는 이도 적지 않았다. 태조는 원래 왕이 되기 전부터 무학대사와 친하여서 그를 왕사로 삼았고, 천태종의 조구를 국사로 삼기도 했다.
왕실불교가 쇠락하기 시작한 것은 사림이 등장한 성종대 이후부터다. 사람의 맹렬한 비판을 받아 불교는 왕실에서 밀려나 산간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16세기 중엽부터 중종의 왕비 문정왕후가 불교를 혹신하면서 불교가 다시 어깨를 펴고 보우, 휴정, 유정, 언기, 태능 등 고승이 배출되면서 교리를 다시 가다듬고 교세를 확장했으며, 임진왜란 때에는 승군이 항일전쟁에 한몫을 했다.
조선초기의 불교교리가 교선의 일치를 내세우면서도 법화경, 화엄경, 능엄경 등을 존중하는 이론불교에 기울어져 있었다면, 16세기 이후의 불교는 휴정의 <선가귀감>에 '교는 부처의 말이요, 선은 부처의 마음'이라고 했듯이 선에 역점을 둔 행동불교의 성격이 강했다.
고려시대에는 도교행사의 지나친 남용으로 국가재정에 손실을 준 것을 고려하여 조선초기에는 도교사원인 도관이 대폭 정리되고, 도교행사도 줄어들었다. 그러나 도교에서의 제천행사는 국가의 권위를 높이는 기능이 있고, 도교의 양생술은 의학발달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조선초기에는 소격서라는 관청을 두고 일월성신에 대한 제사로서 초제를 주관하게 했다. 초제는 궁중에서도 행하고, 단군이 제천했다는 강화도 마니산 등지에서도 행하여 민족의식을 높여주는 기능을 수행했다. 특히 세조는 왕권강화의 수단으로 도교에 호의를 가지고 환구단을 설치하여 제천행사를 자주 거행했다.
그러나 도교는 성리학에서 이단으로 간주하여 16세기 이후로 사림들이 등장하면서 중종 때에는 조광조의 건의로 소격서가 폐지되고, 제천도 중단되었다. 무속도 음사로 간주되어 서울 장안에는 무당이 살지 못하게 했으며, 백성들이 무속으로 패가망신하는 것을 억제했다. 그러나 무속이 지닌 질병치료의 순기능을 인정하여 국가에서는 궁 안에 국무당을 두어 무당의 심령치료를 활용했다.
불교, 도교, 무속 등 전통적인 종교는 이렇듯 조선초기에 개혁을 통한 포용이 나타났으나 사림들의 비판을 받아 16세기 이후로 위축되었다. 그러나 17세기 이후로는 사림들이 다시 종교로서의 순기능을 인정하기 시작했다. 이는 성리학이 차츰 출세도구로 전락하고, 선비들의 심성이 타락하면서 성리학은 심학을 중요시하게 되고, 이와 병행하여 도교, 불교, 양명학 등이 지닌 정신수양의 측면을 긍정적으로 인정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