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학
조선초기에는 삼국시대부터 조선초기까지의 역대 시와 산문의 정수를 모아 133권의 방대한 <동문선>을 편찬했다. 성종 9년(1478)에 서거정, 노사신 등이 왕명으로 펴낸 이 책의 서문에는 '우리나라의 글은 송과 원의 글이 아니고 한과 당의 글도 아니며, 우리나라의 글일 따름이다'라고 하여 우리의 한문학이 중국과 다른 독자성이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 후 중종 12년(1517)에는 신용개, 남곤 등이 <동문선> 이후의 글들을 모아 <속동문선>이라 했는데 서거정, 김수온, 강희맹 등 훈신들의 글들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한편, 중국 당·송시대 시의 정수를 모은 <연주시격>이 역시 성종 때 서거정 등에 의해 편찬되어 중국문학에 대한 이해도 높였다.
조선초기의 창작문학은 도문일치에 의해 유학정신을 번영하는 시와 노래와 산문 등을 창작했다. 관인 중에서는 정도전, 권제, 변계량, 서정, 김수온 등이 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는데, 정도전은 고려말에 가난한 백성들을 동정하는 글을 많이 쓰다가 개국 후에는 조선왕조의 건국을 찬양하는 <문덕곡>, <신도가> 등 가곡을 많이 지어 궁중에서 연주되었다. 권제는 세종 떼 <동국세년가>라는 역사시를 쓰고, 정인지 등은 <용비어천가>를 지어 왕조의 창업과정을 찬미했다. 세종이 석가모니의 공덕을 찬양하여 지은 <월인천강지곡>도 유명하다.
조선초기 문학에서 또 하나 특기할 것은 잡기 혹은 패설작품이 많이 창작된 것이다. 일정한 격식이 없이 세상에 떠도는 이야기를 기록한 패설작품으로는 서거정의 <필원잡기>와 <동인시화>, 성현의 <용재총화>, 남효온의 <추강냉화>, 강희맹의 <촌담해이>, 이륙의 <청파극담>, 조신의 <수문괘록>등이 있다.
이 책들에 실린 내용은 위로는 조정관인들의 기행으로부터 아래로는 일반평민이나 노비에 이르기까지 각계각층 사람들의 생활풍속과 생활감정 그리고 역사의식을 보여주는 것이 많으며, 불의를 폭로하고 풍자하는 내용도 적지 않다. 따라서 패설은 모두 관인들이 쓴 것이면서도 당시 서민사회와 서민문화를 이해하는데 좋은 자료가 된다.
2. 건축과 공예
조선초기 건축은 고려말의 양식을 계승하면서 검소함을 추구하는 유교정신에 따라 사치를 배격하는 새로운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지위의 높고 낮음에 따라 법으로 집의 크기와 높이에 일정한 차등을 두게 했다. 궁궐은 장엄하면서도 검소함을 잃지 않게 짓고, 관인의 집은 최고 40칸을 넘지 못하게 했으며, 평민은 10칸 이하로 제한했다. 또한 건물의 외관에 화려한 장식을 붙이는 것을 막고 실용성을 추구했다.
그래서 조선초기 건축은 견실하면서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많다. 지금 남아 있는 것으로는 서울의 숭례문, 창경궁의 홍화문, 개성의 남대문, 평양의 보통문이 대표적이다. 그 밖에 조선후기에 재건된 것이긴 하지만 경복궁, 창덕궁, 창경궁은 본래 장중하면서도 검박한 궁전이었다.
둘째, 건축에 부설된 휴식처인 정원문화가 매우 독특하다. 정원에는 연못, 정자, 숲 등이 조성되는데, 가능한 한 인공을 가하지 않고 자연미를 그대로 살린 것이 한국정원의 특징이다. 이는 자연자체가 아름다운 우리의 자연환경과 관련이 있고, 사람을 자연 속의 일부로 생각하는 우주관의 영향도 있다. 서양이나 중국 그리고 일본의 정원이 극도의 인공을 가하는 것과는 매우 대조적이다. 창덕궁 후원은 조선정원의 특색을 대표한 명소이다.
사찰건축 중에도 왕실과 관련이 깊은 사찰은 규모도 웅장하고 예술적 가치가 높은 것이 많았다. 태조 이성계와 관련이 깊은 양주의 회암사, 여주의 신륵사 조사전, 대장경을 보관하고 있는 해인사 장경판전, 그리고 세조 때 서울의 원각사 안에 세운 대리석 10층탑은 특히 우수하다. 특히 원각사탑은 고려의 경천사탑을 모방하여 원나라 라마교의 영향이 배어 있다.
3. 그림
조선초기 그림은 전문화가인 화원과 일반 사대부들의 문인화라는 두 측면이 발달하였다. 화원은 공무원 화가로서 국왕이나 세자, 대신들의 초상화를 그리고, 국가의 여러 행사들을 기록화로 남기며, 정밀하고 아름다운 지도제작의 필요에서 국가에서 고용한 화가인데, 도화서에 소속되어 정6품까지의 벼슬을 받았다. 화원들은 공무를 위한 그림도 그렸지만, 여가에는 사대부들의 감상화를 위한 그림도 제작하였다.
감상을 위한 그림의 소재는 산수, 인물, 짐승, 화초 등을 그렸으며, 화초는 부귀를 상정하는 모란과 선비들의 절개를 상징하는 송죽매란 혹은 국화 등을 즐겨 그렸다.
조선초기 화원 중에서 망명이 높은 이는 세종 때의 안견이었다. 그는 특히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의 후원을 받아 수백 점의 그림을 창작했는데, 안평대군의 꿈을 그렸다는 <몽유도원도>가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이 그림은 지금 일본 천리대학에 소장되어 있다. 신숙주가 쓴 화기에 의하면, 안견의 화풍은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화풍을 깊이 연구하고 장점을 절충하여 독자의 경지를 개척했는데, 산수를 특히 잘했다고 한다. <몽유도원도>는 복사꽃이 만발한 평화로운 꽃동산을 웅장하고 환상적인 분위기로 묘사한 것으로, 바로 이상사회를 동경하는 작자와 후원자의 꿈이 서린 작품이다. 산을 그린 수법은 북송 화가 곽희와 유사한 점이 있으나, 그 안에 펼쳐진 농촌풍경은 우리나라의 현실을 묘사한 것이다. 안견은 벼슬이 호군에까지 올라, 같은 시기에 인물화를 잘 그려 벼슬이 당상관에까지 오른 최경과 더불어 화원으로는 가장 우대받았다.
한편, 노비출신 화원 이상좌는 중종과 명종의 사랑을 받아 공신의 지위에까지 오른 인물로서 달밤에 소나무 밑을 거니는 <송하보월도>를 비롯해 <어가한면도>, <노엽달마도> 등의 걸작을 남겼는데 힘찬 필체로 유명하다.
조선초기 그림은 일본 무로마치시대 미술에 큰 영향을 주었다. 화원이 직접 건너가서 창작하기도 하고, 사신들이 가서 그림과 글씨를 남기고 돌아오는 사례도 적지 않았다. 세종 때 일본에 건너간 이수문과 비슷한 시기의 문청은 그 대표적 인물이다. 이 밖에 쿄토 상국사의 승려 주문은 조선의 화풍을 일본에 전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