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농학
조선초기에는 농업기술이 발달함에 따라 그 성과를 종합정리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키기 위해 여러 농서들이 간행되었다.
관청농서로서 가장 먼저 출간된 것은 세종 12년(1430)에 정초 등이 편찬한 <농사직설>이다. 이 책은 중국의 대표적 농서인 <제민요술>과 <농상집요> 그리고 <사사찬요>를 참고하여 중국의 선진적인 화북농법을 받아들이면서 촌로들의 실제경험을 존중하여 우리나라의 기후풍토에 알맞은 독자적인 농법을 역사상 처음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책은 조선후기에 중국 강낭농법을 많이 받아들인 신속의 <농가집성>이 나올 때까지 영농의 기본지침서로 큰 영향을 미쳤다.
한편, 성종 때 강희맹은 금양지방을 중심으로 한 경기지방의 농사경험을 토대로 하여 <금양잡록>을 저술하여 81종의 곡식재배법을 자세히 설명했다 이 책은 뒤에 <농사직설>과 함께 한 책으로 간행되었다.
조선초기에는 양잠, 목축 그리고 원예작물 재배법에 대한 이론서도 편찬되었다. 세조 때 양성지는 <농잠서>와 <축목서>를 간행했고, <잠서주해>와 국문번역판 <잠서>도 편찬했다. 16세기초에는 김안국이 다시 <잠서>를 번역하여 <잠서언해>라 하여 농가에 보급했다. 원예에 관한 책으로는 강희맹의 형 강희안이 세종 때 <양화소록>을 써서 화초재배법을 소개했다.
2. 천문학
천문학은 농업과도 관련이 있을 뿐 아니라 정치의 잘잘못이 천문의 변화를 가져온다는 믿음 때문에 매우 중요시되었다. 재상이 천문을 관장하는 서운관의 최고책임자가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해와 달 그리고 별에 대한 관측을 위해 세종 16년(1434)에 경복궁 경회루 북쪽에 돌축대를 쌓고 그 위에 간의를 올려놓은 간의대라는 천문대를 설치하여 운영했으며 삼각산, 금강산, 마니산, 백두산, 지리산, 한라산 등지에도 천문관을 파견하여 때때로 북극의 높이와 일식, 월식 등 천체운행을 관측했다. 이 밖에 세종 때에는 해시계인 앙부일구, 해시계와 달시계를 겸한 일성정시의, 물시계인 자격루 등 여러 종류의 시계를 만들어 궁중의 보루각과 서울의 혜정교, 종묘 앞 등지에 설치하여 시간을 알려주었는데, 세종 20년(1438)에는 자격루의 일종인 옥루기륜을 제작하여 궁안의 흠경각에 설치했는데, 그 기능이 매우 우수했다. 이 시계는 수차를 같은 속도로 돌게 하고, 여기에 톱니바퀴를 연결해 다른 기계들이 돌게 하여 매시간마다 인형이 나타나 방울을 울리고 북과 징을 치면서 시간을 알려주고, 매 시각을 상징하는 12신의 짐승모형이 나타나게 만든 장치이다. 이들 시계들은 정인지, 정초 등이 이치를 연구하고 천민출신 과학자인 장영실 등이 공역을 감독하여 완성했다.
천문학 분야의 또 하나의 위대한 성과는 <칠정산>이라는 우리나라 독자의 달력을 만든 것이다. 이것은 세종 24년에 집현전과 서운관 학자들이 왕명으로 우리나라의 원나라, 명나라의 역법을 참작하여 만든 것으로,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일식, 월식, 지진, 해무리, 달무리, 혜성의 나타남, 일기의 변화 등 천재지변에 관한 기록이 빠짐없이 수록되어 있어서 천문과 기상에 관한 관심이 얼마나 컸던가를 보여주며, 과학사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3. 의학, 출판·인쇄기술
질병을 치료하는 의학은 역학과 더불어 국가에서 장려한 잡학 중의 하나였으며, 실제로 총명한 학생 중에서 의학을 하는 자가 많았다. 왕실과 국민보건에 대한 관심이 그만큼 컸다. 먼저, 약재에 대한 이론서로는 세종 10년(1428)에 <향약채취월령>을 편찬하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수백 종의 약재를 소개했으며, 세종 15년(1433)에는 이를 더욱 발전시켜 노중례 등에 의해 <향약집성방>이 편찬되었다. 이 책은 7백여 종의 국산약재를 소개하고, 1천 종에 가까운 병증에 대한 치료예방법을 소개했다.
한편, 세종 27년(1445)에는 당시까지의 동양의학에 관한 서적과 이론을 총집대성한 의학백과사전인 <의방유취>가 진순의 등에 의해 왕명으로 편찬되었다. 이 책에는 153종 내외의 의학책들이 부문별로 망라되어 있는데, 이렇게 방대하 의학백과사전이 출판된 것은 세계에서 처음이다. 17세기초 광해군 때 편찬된 <동의보감>은 이런 축적이 바탕이 된 것이다. 의학발달은 도교의 장생술 및 박물학과 깊은 관련이 있어 조선초기에 이 방면의 이해 수준이 높았음을 보여준다.
이미 13세기경에 세계 최초로 발명하여 쓰이기 시작한 금속활자는 조선초기의 교육진흥정책에 따라 더욱 개량되어 태종 3년(1403)에 계미자, 세종 2년(1420)에 경자자, 세종 16년(1434)에 갑인자 등이 차례로 주조되었다. 그중에서도 갑인자는 글자모습이 아름답고 인쇄하기에 편하게 주조되었을 뿐 아니라, 활자가 20여만 개나 되어 가장 우수한 활자로 꼽힌다. 처음에는 구리로 활자를 만들었으나, 세종 18년부터는 그보다 단단한 납을 쓰기 시작했다. 하루에 만드는 활자주조 수량을 구덴베르크가 만든 것보다 약 10배가 많은 3,500자나 되었다. 또 종전에는 활자를 고정시키기 위해 밀을 사용했으나, 세종 때부터는 식자판을 조립하는 방법을 창안하여 종전보다 두 배 정도의 인쇄능률을 올리게 되고 인쇄효과도 한층 좋아졌다.
4. 병서 및 무기
조선초기에는 우리나라 지형에 맞는 전술을 개발하고, 역대의 전쟁사를 정리하여 각종 병서가 편찬되었다. 태조 때 정도전은 요동정벌운동의 필요에서 앞선 시기의 병서를 참고하여 독자적인 <진법서>를 편찬했고, 문종 때에는 타타르의 침략에 대비하여 김종서의 주도하에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전쟁사를 정리하여 <동국병감>을 편찬하고, 또 <진법>이 편찬되어 5위제에 기초한 군사훈련 방법과 진을 치는 방법이 정리되었는데, 이어 세조 원년에는 이석형 등에 의해 역대의 주요 전투를 전략적인 측면에서 정리한 <역대병요>가 편찬되고, 세조가 짓고 신숙주 등이 주석한 <병장설>이 편찬되었다. <진법>은 뒤에 유자광 등에 의해 수정되어 성종 23년(1492)에 <병장도설>로 간행되었다. 이 밖에 세종 때에는 화기 제작과 그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도 간행되었다.
무기는 군기감에서 주로 제작했으나, 지방 군현에서도 제작하는 일이 많았다. 고려말 최무선에 의해 창안된 화약무기는 조선초기에 더욱 개량되어 그 성능이 크게 높아졌는데, 대포의 사정거리는 최대 1천보에 이르러 종전보다 4~5배나 커졌다. 문종 때는 화차로 불리는 신무기가 개발되었는데, 이는 수레 위에 신기전이라는 화살 100개를 설치하고 심지에 불을 붙여 쏘는 일종의 로켓포로 사정거리가 약 1킬로미터로 달했다.
군선으로는 태종 때 돌격용 배로서 거북선을 만든 일이 있으며, 비거도선으로 불리는 작고 날쌘 전투선도 제조되어 해전에서 위력을 보였다. 그러나 무기제조기술은 대외관계가 안정되고, 도덕정치를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한 16세기 이후로는 쇠퇴하기 시작하여 왜란 때 고전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