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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성립 -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

by 스톤나인 2024. 9. 16.

1. 우왕대 권신의 발호와 위화도회군(1388)

 개혁군주 공민왕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우왕(1374~1388)은 공민왕과 신돈의 비첩인 반야 사이에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뒷날 이성계 일파는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이 아니라 신돈의 아들이므로 진짜 왕 씨가 아니라고 하여 폐위시키고 창왕(1388~1389)을 옹립하는 명분으로 삼았다. 공민왕은 다섯 명의 부인을 두었으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이다.

 출생부터 의심을 받은 우왕은 권신 이인임의 추대를 받아 왕위에 올랐는데, 공민왕의 개혁에 반발하는 권문세족의 횡포와 보수반동을 제어하지 못했다. 권력은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 등에게 돌아가고, 이들의 횡포는 극에 달했다. 특히, 토지겸병이 자행되어 부자는 산천을 경계로 할 만큼 방대한 농장을 점유하고, 가난한 사람은 송곳 꽂을 땅도 없다는 말이 나왔다. 또 땅 하나에 주인이 7~8명이 되는 현상도 나타나서 농민들은 2중, 3중의 수탈을 당하고 있었으며, 권세가의 땅을 빌어 차경을 하면서 신분상으로는 주인에게서 예속되어 있었다.

 권문세족은 외교에 있어서도 신흥하는 명을 적대시하고, 멀리 몽고지방으로 쫓겨난 북원을 가까이하는 시대역행적인 우를 범했다. 이렇게 내정이 어지러운 틈을 이용하여 고려를 더욱 괴롭힌 것은 왜구였다. 수십 척 혹은 수백 척의 배를 몰고 다니면서 해안지역에 상륙하여 식량과 문화재 등을 닥치는 대로 약탈해 갔다. 그리하여 서해와 남해 연안지역의 기름진 농토들이 황폐되고 주민들은 산속에 숨어 살았다. 조세를 운반하는 조운도 길이 막혀버렸으며, 개경이 점령당할 위기까지 조성되었다.

 내우외환의 위기 속에서 민중들은 깨끗하고 힘 있는 영웅이 출현하기를 고대했다. 그러한 여망에 부응하여 나타난 인물이 최영(1316~1388)과 이성계(1335~1408) 장군이었다. 이 두 사람은 홍건적 토벌에 이어 왜구토벌에서도 혁혁한 전공을 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두 사람은 체질적으로 다른 점이 있었다. 최영은 우왕의 장인으로서 이미 귀족반열에 올라 있었고, 공민왕 3년(1354) 원의 요청으로 산동성에 출병하여 장사성의 반란을 진압하는 등 원과 긴밀하게 협조해 왔다. 말하자면 그는 보수군벌의 대표자였다.

 이에 반해 최영보다 19세 연하인 이성계는 본래 변방인 영흥지방 토호의 후예로서 아버지 이자춘이 공민왕 때 쌍성총관부를 탈환할 때 협력한 공으로 비로소 개경에 와서 벼슬살이를 하게 된 그야말로 시골출신의 신흥 무장이었다. 그러나 뛰어난 활솜씨로 홍건적과 왜구토벌에 전설적인 공을 세우면서 벼슬이 승승장구했다. 특히 그는 우왕 14년(1388)에 최영과 협력하여 이인임 일파를 몰아내고 문하시중에 올랐다. 이때부터 권력은 최영과 이성계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때 이미 이성계 휘하에는 정도전, 조준을 비롯한 급진파 사대부들이 결집되어 있어 미래의 혁명을 설계해 가고 있었다. 이를 눈치챈 최영은 이성계의 제거를 모색하고 있던 중, 명이 옛 쌍성총관부 땅을 직속령으로 만들기 위해 철령위를 설치한다는 통고를 받자, 최영은 이를 호기로 삼아 명을 징벌하기 위해 요동을 공격하고, 이성계를 그곳 주둔군 사령관으로 내보낼 계획을 세웠다. 그래서 최영이 팔도도통사가 되고 조민수를 좌군도통사, 이성계를 우군도통사로 삼아 요동출병에 나섰다.

 그러나 이성계는 처음부터 요동공격을 반대했다. 이는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좌절시키는 것일 뿐 아니라, 신흥하는 명과 적대관계에 놓이는 것은 국가장래에 불리하다고 판단했다. 여기에 여름철 우기의 작전과 군량미 부족도 우려의 대상이 되었다. 이성계는 이런 생각을 정리하여 <4불가론>을 왕에게 건의했으나, 최영에 의해 묵살되고 출병이 강행된 것이다. 마지못해 출병한 이성계는 압록강 중앙에 있는 위화도에서 말머리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우왕과 최영을 제거해 버리고, 조민수와 이색의 추천을 받아 우왕의 아들 창왕(1388~1389)을 세웠다. 당시 창왕은 9세였으므로 왕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처지였고, 따라서 실권은 이성계에게 돌아갔다.

 

2. 전제개혁과 조선왕조의 개창

이성계 일파는 창왕도 좋게 보지 않았다. 창왕의 외조가 권신 이림인데다 조민수, 이색 등이 추천한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왕도 폐가입진을 내세워 1년 만에 폐위하고, 신종의 7세손인 공양왕(1389~1392)을 옹립했다. 우왕이 신돈의 아들이므로 창왕도 가짜 왕씨라는 것이다. 공양왕은 당시 45세의 장년이었으나,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이성계에게 모든 실권을 넘겼다.

 당시 이성계 휘하에는 이색의 문인으로 성리학과 정치경륜이 뛰어난 정도전(1342~1398)이 막료로 참여하여 조준, 남은, 윤소종 등 급진개혁파를 포섭하여 새 왕조창업을 기획하고 있었으므로, 이성계가 실권을 잡자 바로 건국을 위한 개혁사업에 착수했다. 그 첫번째가 온 국민의 숙원이던 전제개혁이었다. 전제개혁은 위화도회군 직후인 우왕 14년 7월 대사헌 조준과 간관 이행, 전법판서 조인옥 등이 상소를 울리면서 시작되어 공양왕 2년(1390)에는 드디어 옛 토지대장을 모두 불태워버렸는데, 그 불길이 며칠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전제개혁에 대한 반대세력의 저항이 만만치 않아서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공양왕 3년(1391) 1월에 삼군도총제부를 설치하고 이성계, 조준, 정도전이 군권을 장악했다. 그리고 공양왕 3년(1391) 5월에는 드디어 과전법이 공포됨으로써 전제개혁이 일단락되었다. 이 개혁으로 전국의 토지가 재분배되어 관료들은 최고 150결에서 최하 10결의 토지를 수조지로 받게 되고, 이성계에 불복하는 신하들은 10결 혹은 5결의 군전만을 받게 되었다. 따라서 산천을 경계로 삼던 과거의 대지주, 즉 권문세족들은 자연히 몰락하여 중소지주로 떨어졌으며, 종전에 지주와 작인 사이에 이루어지던 차경의 관행이 금지되고, 모든 토지는 1결당 30두를 받는 것으로 낮추어졌다.

 전제개혁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로 무상몰수 무상배분된 것으로, 권문세족들에게는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일반관료와 향리, 군인 등 공역을 지는 자는 생계의 안정을 가져왔고, 일반농민들은 가혹한 신분적 강제에서 해방되어 법으로 정한 조세를 내는 것으로 부담이 줄어들었다. 따라서 전제개혁은 국가재정과 민생안정에 절대적인 기여를 했는데, 이 때문에 이성계 일파는 백성의 지지를 얻어내고, 반대로 권문세족이나 기성 사대부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이성계 일파와 날카롭게 대립하게 되었다.

 전제개혁으로 권문세족의 경제기반을 무너뜨린 뒤에 남은 문제는 새 왕조의 개창을 반대하는 온건개혁파 사대부를 제거하는 일이었다. 특히 공양왕 4년(1392) 4월에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낙마하여 부상당하자 정몽주를 비롯한 인사들은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고자 대반격을 가했다. 그러나 정몽주가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에 의해 선죽교에서 격살되고, 7월 17일 드디어 50여 명 신하들의 추대를 받아 이성계가 왕위에 올랐다. 조선왕조가 개창된 것이다. 새 정권은 도평의사사의 인준을 얻어 합법화되었다. 새 정권은 왕조교체를 민심과 천심의 지지를 받은 것으로 자부하고, 이를 맹자가 말한 역성혁명으로 정당화했다. 조선왕조의 개창은 무력사용을 최소화시키고, 개혁을 통한 민심의 지지와 도평의사사의 인준을 거쳐 권력의 정당성을 얻어냈다는 점에서 정치사에 큰 획을 긋는 사건으로 기록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