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영토확장과 명과의 관계
새 왕조는 건국 직후부터 영토확장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조선초기 지식인들은 우리나라 본래 만주를 포함한 '만리의 대국'이라고 생각하고, 지도나 지리지를 편찬할 때 만주를 우리 국토에 포함시켰다. <고려사> 지리지나 <동국여지승람>의 서문에 그런 표현이 보인다. 말하자면 잃어버린 만주땅에 대한 꿈을 잃지 않으면서 국토확장과 대외관계를 진취적으로 추진했다.
우선, 태조는 정도전을 시켜 함경도지방의 성보를 수리하고 여진족과 주민들을 회유하여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으며, 다른 한편으로 우왕 때 출정했다가 위화도에서 회군한 요동정벌운동을 다시 추진했다.
위화도회군은 전략상 후퇴였지 요동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국 직후 정도전, 남은 등이 주동이 되어 군량미를 비축하고, 전투방법을 개발하여 군사훈련을 강화했다. 그러나 비밀리에 추진되던 이 계획은 명나라에 감지되어 명은 태조의 즉위를 인정하는 인신을 끝까지 주지 않았다. 이성계는 공민왕 때에도 요동출병을 한 일이 있었으므로 명은 처음부터 태조를 믿지 않았다가 개국 후 그 의심이 더욱 커진 것이다. 명은 요동정벌운동의 주모자인 정도전을 '조선의 화근'이라고 하면서 명에 압송하라고까지 다그칠 정도였다.
태조의 요동정벌운동은 왕자나 종친들이 거느리고 있는 사병을 혁파하여 공병으로 귀속시키고, 왕자 간의 권력투쟁을 막으려는 의도도 숨어 있었다. 그래서 사병을 잃게 된 이방원의 반격이 일어난 것이며, 그의 집권은 요동정벌운동의 중단을 의미한다.
태종은 요동수복을 포기한 대신 충청, 전라, 경상도의 부유한 주민들을 대거 북방으로 이주시켜 압록강 이남지역의 개발을 추진했다. 이러한 사민정책은 그 후 세종에서 성종 때까지 이어져 수만 호의 주민이 이주했으며, 그 결과 황막했던 함경, 평안, 황해도지방이 개발되고 남북간 인구배치의 균형이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
압록강과 두만강 유역에 대한 영토화정책은 세종 때 더욱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 세종 15년(1433)에는 최윤덕을 보내 압록강변의 여진족 이만주를 토벌하고, 다음해에는 김종서를 두만강유역에 보내 여진족을 강 밖으로 몰아냈다. 그리고 함경도북부 두만강연안에 6진을, 평안도북부 압록강연변에 4군을 설치하여 영토로 편입했다. 그러나 조선왕조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국경선으로 생각하지 않았으며, 그 이북의 땅도 미수복지구로 생각했다. 수복된 지역에는 토착민을 토관으로 임명하여 자치를 허용하고, 강변지역은 전략촌으로 특수하게 편제하여 여진족의 침략에 대비했다.
여진족에 대한 토벌정책과 병행하여 그들을 회유, 포섭하는 정책도 병행되었다. 여진족의 생활을 돕기 위해 식량, 농기구, 의류등을 국경지역에서 무역하도록 허용하고, 여진 추장의 조공과 귀화를 적극 권장하여 많은 여진족이 귀화했다
한편, 명과의 관계는 태조의 요동수복정책으로 한때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태종의 등장으로 우호관계가 회복되었다. 명은 과거 어느 왕조보다도 강경한 대외정책을 써서 주변국가를 제후로 묶어두려고 했으므로 조선왕조도 그 체제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리하여 두 나라는 형식상 천자와 제후관계를 맺고, 새왕이 즉위하면 천자의 승인을 받는 절차를 거쳐 인신과 고명을 받았으며, 명의 달력을 사용하였다. 이런 절차를 책봉이라 했다. 그리고 명의 주요한 명절이나 그밖에 우리가 필요한 경우에는 수시로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품을 조공이라는 형식으로 보내고 우리가 필요한 물품을 회사라는 형식으로 받아왔는데, 이를 통해 경제 및 문화교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조선사신은 동방예의지국에서 온 사신으로 취급되어 다른 나라 사신에 비해 특별한 우대를 받았다. 조선에서 가져가는 물품은 종이, 붓, 화문석, 금, 은, 인삼, 도자기, 책, 말 등이었는데 특히 종이는 질기고 매끄러워 등피지 혹은 경면지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중국 황실과 귀족의 애호품으로 큰 사랑을 받았다. 한편, 중국에서는 책, 비단, 약재, 문방구 등이 들어왔다.
2. 일본 및 동남아 국가와의 관계
조선왕조의 영토확장은 남방에도 미쳤다. 고려 공민왕 이후로 식량과 문화재를 약탈하기 위해 들어오는 일본 하급무사, 즉 왜구 때문에 해안지방은 하루도 편한 날이 없었으며, 백성들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가 없었다.
왜구는 특히 대마도 왜인이 앞장서고 큐슈지방의 호족이 뒤를 후원했는데, 그만큼 식량이 부족하고 선진문명에 대한 욕구가 컸다. 그래서 평시에는 대마도주가 토산품을 조공으로 바치고 회사품을 받아갔는데, 이것만 가지고는 욕구를 충족시킬 수가 없어서 물자가 풍부한 우리나라 해안지방을 약탈하게 된 것이다. 고려는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화약무기를 개발하고 몇 차례 왜구토벌을 했었다.
조선개국 후 국력이 커지면서 대포 등 무기가 개량되고, 국방력이 강화되어 왜구의 침략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이에 따라 황폐되었던 해안지역이 다시 개발되고 농지가 확대되었으며, 국가수입도 늘어났다. 침략과 약탈이 어려워진 것을 알게 된 왜구와 그 배후세력인 호족은 평화적인 무역관계를 요구해 왔다. 조선은 일본과의 선린을 유지하기 위해 이를 승인하고 부산과 창원을 개항하여 제한된 무역을 허용했다.
그러나 일본상인들은 조선의 통제무역에 불만을 품고 밀무역을 감행하거나 해적으로 돌변하기도 하여 조선정부는 일본해적의 버릇을 고쳐주기 위해 단호한 응징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드디어 세종 원년(1419) 6월 19일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소탕하고자 227척의 함선과 1만 7천여 명의 수군을 원정군으로 파견했다. 이를 기해동정이라 한다.
이 원정은 당시 병권을 쥐고 있던 상완인 태종에 의해 계획된 것인데, 이종무의 지휘로 약 보름간에 걸친 토벌작전 끝에 적병 114명을 참수하고 2천 호의가옥을 불태웠으며, 129척의 선박을 노획했다. 대마도주 무네는 조선군의 위세에 눌려 저항을 멈추고 수호하기를 애걸하여 조선군은 7월 3일 항복을 받고 거제도로 돌아왔다.
대마도 토벌은 창왕 원년에도 박위에 의해 이루어지고, 태조 5년에도 김사형에 의해서 이루어졌는데, 세종 원년의 정벌은 큐슈지방의 호족들이 총동원되어 대마도를 방어했기 때문에 전도를 정복하지는 못했다.
일단 강한 힘을 보여준 조선정부는 대마도주가 수시로 토산품을 바치면서 무역을 애걸하므로 그들의 요구를 적당한 서넹서 들어주기 위해 세종 8년(1426) 남해안의 세 항구, 즉 삼포를 열어 무역을 허용하고 다시 세종 25년(1443)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1년에 50척으로 무역선을 제한했다.
왜인에게 식량, 의복, 옷감, 서적 등을 주고 우리는 동, 유황, 물감, 향료, 약재 등을 구입했다. 일본은 태종 11년에 우리나라에 없는 코끼리를 진상하여 화제가 되었는데 정부에서는 이를 태복시에서 기르다가 사람이 밟혀 죽은 사건이 일어나고, 먹는 양에 비해 하는 일이 없어 2년 뒤에 전라도 섬으로 유배 보냈다. 말하자면 왜인은 생활필수품과 문화재를 가져가고, 우리는 무기원료나 기호품을 받았다.
한편, 대마도나 왜구와는 별개로 일본은 고려말 충혜왕 때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남북조의 분열이 통일되어 무로마치시대(1338~1573)가 열리고 국가기강이 잡혀갔으며 조선과는 서로 사신을 보내 대등한 선린외교를 펼쳐갔다. 그러나 조선에서 가는 통신사보다는 일본에서 오는 사행의 빈도가 훨씬 많아 일본이 더 열성적이었다. 성종 2년(1471)에 편찬된 신숙주의 <해동제국기>는 그가 세종 때 일본에 다녀와서 기록한 견문록으로서 당시 일본과 유구의 정치, 경제, 지리, 풍속 등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무로마치 정부는 불교문화를 진흥시키기 위해 조선의 <대장경>을 탐내고 거듭거듭 사신을 보내 간절히 요구하고 때로는 지나친 생떼를 쓰기도 했다. 이런 요구가 계속되자 태종 13년(1413) 이후에는 여러 차례 <대장경>을 건네주었는데, 이것이 일본 불교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조선과 문물을 교류한 나라는 이밖에도 여진과 유구(오키나와), 섬라(태국), 자바(인도네시아) 등이 있었다. 이들 나라는 조선정부에 조공 혹은 진상의 형식으로 토산품을 가지고 와서 의복재료, 문방구, 서적, 불종, 불상 등을 회사품으로 받아갔다.
특히 유구와의 관계는 매우 밀접하여 고려말부터 왕국을 건설하고 고려 및 조선정부에 적극적으로 사신을 보내 토산품을 조공으로 바치고 불경이나 불종 등 불교문화재를 받아가서 그곳 불교문화발전에 이바지했다. 유구는 17세기초에 이르러 일본의 사쓰마번에 의해 정복될 떄까지 조선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추진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경복궁 대궐 앞에는 일본 및 동남아에서 온 사신들로 붐볐다고 하며, 궁안에서 대표를 발사하는 실험에 놀라 혼비백산한 일이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조선은 당시 명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문화수출국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