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 국호
태조 이성계에서 제9대 성종(1469~1494)에 이르는 15세기 100년간은 새 국가의 이념과 통치질서가 틀을 잡아가던 시기였다. 태조(1392~1398) 때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 개국공신이 실권을 쥐고 국호를 제정하고 통치이념을 정비했으며, 태조의 강력한 의지에 따라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는 등 새 국가의 기초를 다졌다. 특히 정도전이 왕조의 설계자로서 큰 역할을 맡았다.
국호는 고조선을 계승하겠다는 뜻을 담은 조선과 이성계의 고향인 화녕이라는 두 개의 국호를 만들어 명나라 황제와 상의하여 조선으로 정했다. 조선은 단군조선에서 역사의 유구성과 천손후예의 자부심을 찾고, 정전제와 8조교를 시행하여 조선을 도덕적 이상국가로 만든 기자조선에서 도덕문명의 뿌리를 찾아 이를 계승한다는 역사계승의식이 담겨 있었다. 위만조선은 찬탈자이므로 계승할 가치가 없다고 믿었다. 단군과 기자에 대한 인식은 고려말 일연의 <삼국유사>와 이승휴의 <제왕운기>등에 정리되어 있어서 이미 사대부 지식인들 사이에 친숙해진 역사의식이었다. 따라서 새 왕조의 국호는 사대부 지식인들이 발전시켜 놓은 역사의식을 수렴하여 건국이념으로 승화시키고, 이를 바탕으로 고조선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법고창신의 주체성과 도덕성이 반영되어 있었다.
단국과 기자는 그 후 각종 역사책에서 통설로 받아들여지고, 또 국가에서 제사를 지내는 위대한 조상신으로 숭앙되었다. 평양에 세운 기자사당은 고려시대에도 있어서 이를 그대로 계승했으나, 단군을 새로 숭앙하기 위해 기자사당 옆에 단군사당을 따로 세우고, 중국에서 사신들이 올 때에는 이곳에 먼저 참배하게 하여 우리가 단군의 후예임을 알려주었다. 또 황해도 문화현 구월산에는 전부터 환인, 환웅, 단군을 제사하는 삼성사라는 사당이 있어서 흉년이 들거나 질병이 돌거나 혹은 아기를 갖지 못하면 민간인들이 이곳에 참배하여 삼성이 구제해 주기를 기원하는 풍습이 있었는데, 조선왕조는 이곳에도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국호가 조선으로 정해지고, 단군숭배가 강화된 것은 민족의식이 한 단계 심화된 것을 의미한다. 고려가 고구려의 영광을 계승한다는 뜻으로 국호를 고려라고 했으나, 고구려는 삼국의 하나로서 민족을 대표하는 나라가 될 수는 없었다. 이에 비해 조선은 삼국의 공통된 뿌리이므로 삼국유민이 모두 숭앙할 수 있는 대상이 되었고, 결과적으로 삼국유민 의식을 청산하여 민족통일의식을 높이는데 이바지했다.
2. 새 수도
태조 3년(1394) 10월 새 왕조는 수도를 개성에서 한양으로 옮겼다. 한반도의 중앙에 위치한 한양은 남쪽에 한강을 끼고 있어서 수로교통이 편리할 뿐만 아니라, 주변에 높은 산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천혜의 요새지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일찍이 백제가 이곳에 근 5백 년 간 수도를 정하여 강국을 건설했고 뒤에는 고구려, 신라도 이곳을 점령하여 삼국문화가 골고루 스며들어 있어서 지방색이 가장 적은 곳이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도 한양을 명당으로 지목하고 문종(1046~1083) 때 이곳을 남경으로 승격시켜 도시화를 추진하고, 숙종(1095~1105) 때에는 이곳에 궁궐을 짓고 경역을 확정하면서 왕이 여러 달씩 순주했다. 당시 명당설을 적극적으로 들고 나온 것은 민족지리학자인 풍수가들이었다. 특히 우리나라 풍수지리의 창도자인 도선의 후계자임을 자처하던 김위제는 한양으로 도읍을 옮기면, 사해의 신령한 물고기들이 한강으로 모여들고 한강의 어룡들이 사해로 뻗어나가며, 나라 안팎의 상인들이 보배를 갖다 바치는 세계의 중심국가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고려왕들은 이곳으로 도읍을 옮기려고 몇 차례 시도했으나, 한양의 주인공은 왕씨가 아니라, 목자의 성을 가진 이씨가 된다는 믿음이 민간에 널리 퍼져 천도를 포기했다.
그런데 조선왕조를 개창한 이성계는 바로 자신이 한양에서 밝고 깨끗한 새 세상을 열 수 있는 주인이라고 생각하여 한양천도를 결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한양의 궁궐배치를 둘러싸고 신하들 간에 의견차이가 있었으나, 결국 정도전의 주장을 따라 백악을 주산으로 하여 궁궐과 종묘, 사직을 배치하는 현재와 같은 도시구조로 낙착되었다.
한양건설은 천도 후에 이루어졌다. 먼저 통치의 중심공간인 궁궐을 백악산 아래에 남향으로 짓고 왕실조장의 신주를 모신 종묘, 땅과 곡식의 산을 모신 사직을 궁궐의 좌우에 건설했으며, 태조 4년(1395)부터 도성이 건설되었다. 도성은 한양의 자연지세를 이용하여 주산인 백악과 좌청룡에 해당하는 낙산, 우백호에 해당하는 인왕산, 안산에 해당하는 남산을 연결하는 둥근 모습으로, 그 길이는 약 17킬로미터에 달했으며 8도의 군인들을 동원하여 구역별로 나누어 건설했다. 그밖에 관아, 시장, 학교 등이 차례로 건설되었다. 그리고 정도전이 궁궐의 전당과 도성의 성문 그리고 52방의 이름을 지었는데, 여기에는 유교적 윤리덕목과 오행사상을 담았다.
수도 한양에는 관료, 수공업자, 상인, 주민들이 모여들어 약 10만 명의 인구를 헤아리게 되었으며, 무당이나 승려는 도성 안에 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도성 밖 10리를 성저십리라 하여 개인의 무덤을 쓰거나 벌채를 하지 못하도록 규제했다. 말하자면 그린벨트 지역으로 묶어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