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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의 성립 - 국가체제의 완성

by 스톤나인 2024. 9. 19.

1. 태종과 세종

태조는 재위 7년 만에 일어난 왕자들의 권력투쟁에 실망하여 물러나고, 그다음 태조의 둘째 아들로서 왕위에 오른 정종(1398~1400)도 2년 만에 물러나, 왕위는 태조의 다섯째 아들 방원에 돌아갔다. 18년간에 걸친 태종(1400~1418)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태조의 다섯째 아들인 태종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고 정몽주를 제거하는데 앞장서는 등 개국에 공로가 크고 능력도 있었으나, 이성계의 신임을 얻지 못하여 왕위 계승에서 탈락했다. 이에 위기를 느낀 그는 이복동생으로 세자가 된 방석과 세자를 보호하고 있던 정도전 일파를 무력으로 처단하고, 이어 친형인 방간의 도전을 물리친 후 정종을 압박하여 왕위를 물려받았다.

 태종은 왕위에 오른 후 태상왕인 이성계와 심한 갈등을 일으켰으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권세있는 신하든 공신이든 처남이든 가리지 않고 처단하고, 6조를 왕이 직접 장악하여 의정부 재상중심의 정책운영을 국왕중심체제로 바꾸었다. 또 언론기관인 사간원을 독립시켜 대신을 견제하게 하고, 궁궐에 신문고를 설치하여 반란음모를 고하게 했다. 국가경제에 해독을 끼치는 사원의 토지를 몰수하여 전제개혁을 마무리 짓고, 개인이 소유하고 있던 사병을 혁파했다. 그밖에 억울하게 공노비가 된 자를 조사하여 해방시키고, 지방의 호족을 억압하여 군역을 지도록 만들었다.

 태종은 왕자간의 권력투쟁이 일어난 경복궁을 피하여 5년(1405)에 창덕궁을 새로 건설하기도 했다.

 태종은 재위 18년만에 왕위를 셋째 왕자에게 물려주니 이가 세종(1418~1450)이다. 태종은 물러나서도 군권을 장악하고 세종을 후원했다. 태종이 악역을 맡아 추진한 개혁의 결과 세종은 32년간 안정된 왕권과 경제력을 기반으로 유교적 문화통치의 꽃을 활짝 피웠다. 세종은 특히 백성들의 복지진흥에 힘을 기울였다. 공법을 실시하여 전세를 낮추고 공평하게 부과했으며, 의창제를 실시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감옥시설을 개선하였으며, 관비의 출산휴가를 늘려주었다. 그밖에 사형수에 대한 복심제를 시행하여 억울하게 죽는 일이 없도록 했다.

 인재등용에 있어서도 천인을 과감하게 등용하고, 수공업자와 상인에게도 잡직이라는 벼슬길을 열어주었다. 재인(광대)과 화척(도살업자)을 신백정이라 하여 양민으로 올려주기도 했다. 천인과학자 장영실이 우대받은 것도 이때이다.

 세종 정치를 보좌한 두뇌집단은 집현전 출신의 학자들이었다. 궁 안에 설치한 정책연구기관인 집현접의 젊은 학자들은 일반 신하들보다 고급대우를 받으면서 중국 및 우리나라의 전통문화를 깊이 연구하여 이를 책으로 편찬하고, 국왕의 정책에 자문했다. 정인지, 신숙주, 양성지, 서거정 같은 우수한 학자들이 여기서 배출된 것이다.

 세종은 민생과 관련된 중요한 정책을 결정할 때에는 백성들의 여론을 존중했다. 예컨대 공법을 제정할 때에는 조정의 신하와 지방의 촌민에 이르기까지 18만 명의 찬부를 묻고, 그래도 부작용이 있을까 염려하여 10년 간의 시험기간을 거친 뒤에 전국적인 시행에 들어갔다.

 세종은 대외적으로도 큰 일을 했다. 즉위 원년에 이종무를 보내 왜구의 소굴인 대마도를 징벌하게 했으며, 북방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4군과 6진을 개척하는 개가를 올렸다. 세종이 죽은 뒤 사람들은 세종을 <해동의 요순>으로 숭앙했다.

 

2. 세조와 성종

 세종 말년에 이르러 대륙의 정세에 변화가 일어났다. 명나라가 타타르를 공격하다가 황제가 포로로 잡히는 이른바 '토목의 변'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조선에도 위기감을 조성하여 국방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다. 그런데 세종 다음의 문종(1450~1452)이 재위 3년 만에 타계하고, 그의 아들 단종(1452~1455)이 12세에 즉위하여 위기관리에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정치실권은 호랑이 재상으로 불리는 김종서와 황보인 등에게 돌아가고, 왕실은 허수아비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허약한 임금의 모습에 위기를 느낀 단종의 두 숙부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은 비상수단으로 왕위를 찬탈하려고 경쟁하다가 무사들을 많이 포섭한 수양대군이 문사들을 포섭한 안평대군을 누르고 왕위에 올랐다. 이가 7대 임금 세조(1455~1468)다. 그 과정에 김종서와 홍보인을 죽이고 안평대군을 유배 보냈으며, 왕위를 물려주고 창덕궁에 살고 있던 단종을 멀리 강원도 영월로 유배 보냈다.

 유교정치의 법도에 어긋나는 세조의 왕위찬탈은 많은 유신들의 반발을 받았다. 삼중신, 사육신 등이 단종복위를 음모하다가 처참하게 처형되었다. 그러나 세조는 재위 14년간 유교정치에 벗어난 일을 많이 했으나 결과적으로 왕권을 안정시키고, 경제와 국방을 강화하는데 기여했다. 세조는 종친들을 정치에 참여시켜 종친의 지지를 얻어내고, 진관체제를 실시하여 변방중심의 방어체제를 전국적인 지역중심 방어체제로 바꾸었으며, 호적사업을 강화하고 보법을 실시하여 군정수를 1백만 명으로 늘렸다. 또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기 위해 퇴직관료에게 지급하던 과전을 없애고 현직관료에게만 지급하는 직전법을 시행했다.

 세조는 전제강화와 부국강병을 위해 성리학을 억압하고, 그 대신 민족신앙과 도교 그리고 법가의 이념을 존중했다. 만주를 차지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영광을 되살리려는 꿈을 품고 고대사를 자랑스럽게 고쳐 쓰기 위해 <동국통감> 편찬을 주도했으나, 신하들의 적극적인 협조를 얻지 못해 완성을 보지 못했다. 또 만세불변의 법전을 만들기 위해 <경국대전> 편찬사업도 벌였으나 일부만 완성하고 말았다.

 세조의 집권으로 왕실의 위상이 높아지고 부국강병이 강화되었으나, 무리한 개혁으로 관료와 지주층의 생계를 압박하고, 과도한 군역부담으로 민생도 악화되었다. 이런 가운데 함경도에서 이시애가 지도하는 토호반란이 일어나고, 한명회를 비롯한 공신들과도 사이가 벌어졌다. 세조는 재위 14년 만에 타계하고 둘째 왕자 예종(1468~1469)이 즉위했다.

 그러나 예종이 1년 만에 타계하자, 예종의 형인 도원군의 아들이 왕위를 이으니 이가 9대 성종(1469~1494)이다. 13세에 왕이 된 성종 초기에는 한동안 할머니 정희왕후(세조비) 윤씨와 어머니인 소혜왕후 한씨가 정치를 돌보는 가운데, 세조의 집권을 도왔던 한명회 등 대신들이 실권을 쥐었다. 한명회는 자신의 두 딸을 예종과 성종의 비로 들여 2중으로 국구가 되어 막강한 위세를 떨쳤다.

 20세가 되어 친정을 시작한 성종은 권신들을 견제하고, 세조대에 굴절된 유교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젊고 기개 있는 선비들을 중용하기 시작했다. 경상도 선산출신의 선비 김종직과 그 문인들의 언론과 문한직에 포진하여 의정부 대신들을 견제하면서 왕권을 떠받쳐 주었다.

 성종은 현실주의자인 기성관료들과 유교적 근본주의자인 선비들의 두 정치세력을 서로 조화시키면서 개국초부터 추진되어 오던 문물개혁사업을 마무리지었다. 우선, 세조 때부터 시작한 <경국대전> 편찬을 완료하여 반포하고, 우리나라 전국 지리지인 <동국여지승람>, 우리나라 역대 문장의 정수를 모은 <동문선>, 세조 때부터 착수해 온 우리나라 통사인 <동국통감> 편찬을 완료했다. 이것들이 완성의 의미를 갖는 것은 국왕, 훈신, 사림 등 당시의 대표적 정치세력이 서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공동참여하여 일단 합의를 이끌어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개국한 지 100년 만에 조선적 특색을 지닌 통치질서와 문화를 완성했다. 성종의 묘호는 그래서 붙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