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림의 등장
16세기 관인사회는 이상주의자와 현실주의자의 두 파로 갈리어 서로 경쟁하면서 때로는 심각한 갈등과 충돌을 일으켰다. 이상적인 유교정치인 왕도정치를 내세우면서 개혁을 요구하는 사림과 부국강병의 현실주의 노선을 지지하면서 기득권을 지키려는 훈신과 척신의 갈등이 그것이다.
사림이란 세력화된 선비들을 말한다. 성리학이 보급되면서 지방에서도 선비들이 무더기로 배출되어 세력화가 이루어졌는데, 지방사림이 최초로 정계에 등장한 것은 성종(1469~1494) 때부터다.
세조의 지나친 부국강병정책으로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세조를 보좌하면서 권력과 부를 장악한 훈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성종은 당시 신망이 높던 경상도 선사출신 선비 김종직과 그 문인들을 대거 등용하여 주로 정책을 비판하는 언론삼사에 임명했다. 김종직은 김숙자의 아들로서, 김숙자는 왕조개창을 반대하여 선산으로 내려가 후학을 기른 길재에게서 배우고, 길재는 정몽주의 학풍을 계승했으므로 이들의 체질은 매우 야당적이었고, 중앙의 훈신들과는 호흡이 맞지 않았다.
성종의 비호를 받아 급성장한 영남사람딜은 부국강병정책을 반대하고 권력과 부를 축척한 훈신들을 공격하면서 향촌자치와 향촌사회의 안정 그리고 선비의 정치적 자율성을 높이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그래서 지방선비의 수령자문기관인 유향소를 복립하고, 주희가 시도한 사창제를 도입하여 빈민을 구제하고 향사례, 향음주 등의 실시를 주장하고 나섰다.
사림의 정치이상은 강력한 중앙집권국가의 건설이 요망되었던 여말선초에는 호소력을 갖지 못했으나, 이미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고 그 부작용이 나타나고 있던 15세기말에는 설득력을 가질 수 있었다. 따라서 사림의 등장은 국가발전을 중요시하는 창업의 시대에서 지방사회의 안정을 추구하는 수성의 시대로 넘어가는 역사적 전환기에 나타난 새로운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2. 훈척과 사림의 갈등-사화
성종대에는 훈신과 사림의 정치적 입장은 달랐어도 양파 간의 세력균형이 이루어져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다. 오히려 두 세력이 협력하여 <경국대전>을 비롯한 <동국통감>, <동국여지승람> 등 기념비적인 편찬사업을 마무리하고 왕조의 문물을 완성해 놓았다. 이는 훈신 중에서도 서거정, 노사신, 최향, 양성지 같은 인물은 집현전에서 양성된 학자들이고, 또한 훈신과 사림의 세력균형을 도모한 성종의 지도력에 원인이 있었다.
그러나 성종 다음에 연산군(1494~1506)이 즉위하면서 사정은 달라졌다. 원래 시재와 감성이 뛰어난 연산군은 생모(성종비 윤씨)가 윤필상 등 신하들의 충동으로 죽기 된 것을 알고나서부터 훈신과 사림을 모두 눌러 왕권을 강화하려 했다. 특히 분방한 언론활동으로 왕권을 견제하는 사림을 연산군은 싫어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평소 사림의 공격을 받아 수세에 몰려 있던 훈신 잔류세력인 이극돈, 유지광 등은 연산군 4년(1498)에 사림 김일손이 지은 사초를 문제 삼아 왕을 충동하여 김일손, 표연말, 정여창, 최부 등 수십 명의 사림을 사형 혹은 유배 보냈다. 그리고 이미 죽은 김종직의 무덤을 파헤쳐 시신을 참수했다. 이 사건을 무오사화 혹은 사화라 한다. 이로써 김종직 문인으로 구성된 영남사림이 크게 몰락했다.
사림을 몰아낸 연산군은 훈신마저 제거하여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자신의 생모 윤씨가 윤필상 등 훈신들의 주청으로 폐비사사된 것을 임사홍을 통해 알고 이 사건에 관여한 훈신들과 남아 있던 사림을 몰아냈다. 연산군 10년(1504)에 일어난 이 사건을 갑자사화라 한다. 이 사화로 성종시대에 양성한 사림들이 대부분 몰락했다.
두 차례 사화로 비판세력을 거의 숙청한 연산군은 사치와 방탕을 마음대로 했다. 호화로운 잔치와 사냥이 일과로서 이를 위해 과도한 공물을 거둬들여 민생이 도탄에 빠졌다. 관인들에게 신언패라는 팻쪽을 차고 다니게 하여 말조심을 하게 하고, 자신의 행동을 비난하는 글이 국문으로 쓰였다 하여 국문학습을 탄압했다.
연산군의 학정에 견디다 못한 전이조참판 성희안은 지중추부사 박원종, 이조판서 유순정 등과 더불어 훈련원 군대를 동원해 궁을 습격하여 연산군을 강화의 교동으로 추방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진성군을 왕으로 추대했다. 이것은 중종반정(1506)이다. 신하들의 쿠데타로 왕을 교체한 최초의 사건이기도 하다.
그러나 중종(1506~1544)을 옹립한 반정공신들의 횡포로 사림과 백성의 여망이 어그러지자 왕은 10년(1515)에 조광조를 비롯한 젊은 사림을 현량과를 통해 특별채용했다. 중종의 신임을 크게 받은 조광조는 개국공신 조온의 후예로서 그를 추종하는 사림들도 큰 벼슬을 지낸 기호출신 벼슬아치의 후예뜰이 대부분이었다.
조광조 일파는 삼사의 언관직에 포진하여 공론을 표방하면서 급진적인 개혁을 요구하고 나섰다. 연산군의 학정을 통해 무엇보다도 군주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아 경연을 강화하고, 내수사 장리의 폐지, 소격서의 폐지 등을 주장하고 나아가 향촌사회의 자율과 안정을 위해 향악의 실시와 <삼강행실도>, <이륜행실도>, <주자가례>, <소학> 등을 보급할 것을 주장했다. 그 밖에 농민생활 안정을 위해 토지겸병의 반대와 균전제 실시, 방납의 시정 등을 촉구했다.
사림의 정책은 무너지고 있던 지방사회를 안정시키는데 주안점을 둔 것으로 개혁적인 의미가 크고 백성들의 환영을 받았다. 그러나 조광조의 개혁정치는 반정공신들의 반발을 샀다. 특히 반정공신으로 책봉된 100명 가운데 4분의 3에 해당하는 76명은 부당하게 책록 되었으므로 이를 취소시키고 토지와 노비를 몰수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공신들의 반발과 원한을 샀다. 공신들은 사림들이 지나치게 언권을 행사하여 <경국대전>에 규정된 권력구조를 흔들고 있다고 역습했다.
중종은 처음에는 사림들을 크게 신임했으나, 나중에는 지나치게 임금을 압박하는 데 싫증을 느꼈다. 이런 분위기를 이용하여 중종 14년(1519)에 남곤, 심정, 홍경주 등 공신들은 조광조 일파에게 반역죄의 누명을 씌워 대거 죽이거나 귀양 보내게 만들었다. 이때 조광조는 능주로 귀양 가서 사약을 받고 38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사건을 기묘사화라 하고, 이때 화를 입은 선비들은 후세에 기묘명현으로 부르게 되었다.
기묘사화가 있은 지 10년 뒤에 중종은 훈구대신들을 견제하기 위해 다시 사림을 등용하기 시작했으나, 1545년에 명종이 즉위하면서 일어난 을사사화에 또다시 사림들이 숙청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외척 간의 권력투쟁에서 빚어진 것이 다른 사화와 다르다. 즉 중종이 돌아가자, 둘째 왕비 장경왕후의 소생인 인종(1544~1545)이 즉위하고 왕비의 동생인 윤임이 세력을 떨쳤으나 재위 8개월 만에 죽고, 이어 셋째 왕비 문정왕후 소생 명종(1545~1567)이 왕위에 올랐다. 그런데 명종 역시 어린 관계로 문정왕후가 수렴청정하고 동생인 윤원형이 세력을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