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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림의 성장과 그 문화 - 부의 집중과 공납·군역의 과중

by 스톤나인 2024. 10. 11.

1. 토지집중과 상업발달

 토지의 편중을 완화하고 관인과 농민의 자립기반을 안정시키는데 기여했던 과전제도가 16세기에 들어와 무너지면서 토지겸병이 다시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통제경제와 시장경제의 균형이 시장경제 쪽으로 기울어지면서 분배정의는 후퇴했으나 지주제에서도 농업생산력은 높아졌다.

 우선 왕실이 토지겸병에 나섰다. 원래 왕실경비는 내수사에 소속된 약 1만 결의 토지와 1만 명의 노비로부터 얻은 수입으로 충당되고 있는데, 그 수입을 장리라 불리는 고리대로 이용하여 재산을 늘려갔다. 특히 왕실의 사치가 절정에 달했던 연산군 때 내수사 재산은 더욱 늘어나고 백성들의 원성도 높아졌다. 16세기초 중종 때 내수사 장리가 일시 중단되기도 했으나 다시 부활했다. 내수사는 토지뿐 아니라 산림, 어장, 목장, 하천까지도 겸병하여 왕실은 제일 큰 부자로 떠올랐다.

 세조 때 실시된 직전제가 16세기 중엽 명종 때에 이르러 완전히 폐지되면서 녹봉에 의지하는 생활에 곤란을 느낀 관인들은 토지를 개간하기도 하고, 사들이기도 하며 때로는 농민에게 빚을 주고 그 대가로 땅을 차지하기도 하는 등 여러 가지 방법으로 사유지를 확대해 갔다. 특히 명종대 권력을 쥐고 있던 중종비 문정왕후의 오라비 윤원형 집안을 비롯한 척신과 권신들은 많은 노동력을 투입하여 서해안일대의 해택지를 개간했다. 겸병현상은 민전에서만 아니라 관둔전에서도 나타나고 산림, 어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토지겸병으로 부호가 된 것은 대부분 서울 양반들이었지만, 큰 상인이나 토호 중에도 대지주가 나타났다. 16세기 중엽 남방지역에서는 수백 결의 토지를 차지한 지주들이 생겨났다. 토지겸병이 성행하면서 병작관계는 더욱 확대되고 농민의 계급문화가 촉진되었으며 국가의 전세수입은 갈수록 축소되었다.

 토지를 잃은 농민들은 상업으로 직업을 바꾸어 '국민의 10분의 9가 상인'이라는 과장된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많은 상인들이 서울에 모여들자 식량을 공급하기 위해 곡물시장이 형성되고, 곡물매매를 전업으로 하여 돈은 모은 큰 상인도 생겼다. '부상대고' 불리는 상인들은 공문의 방납을 통해서도 막대한 이득을 얻었으며, 중국과 사무역에 종사하여 은을 가지고 가서 비단, 모피를 비롯한 물품을 사들여와서 이득을 남기기도 했다. 또 그들은 삼포를 중심으로 일본과의 무역에도 참여하여 무명, 베, 명주 등 옷감과 곡식을 팔고, 그 대신 은, 구리, 쇠, 단목, 후추 등을 사들였다. 중종 때 권신이던 김안로와 척신인 윤원형 같은 이는 대외무역에 참여하여 막대한 재산을 모았다.

 지주제와 상업의 발달은 농민뿐만 아니라 지방의 중소지주까지도 파산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중소지주 출신 사림 중에는 천방과 보의 축조를 통해 관개농업을 발전시켜 생산력을 높여 가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권신과 척신의 탐욕으로 해를 입은 농민들은 폭동을 일으켜 대항하기도 했다. 16세기 중엽 명종(1545~1567) 때 황해도, 평안도, 함경도, 강원도, 경기도를 무대로 일어난 임꺽정 일당의 도적활동(1545~1567)은 그러한 농민폭동의 한 예이다. 이 무렵 연이은 흉년과 지진은 민심을 더욱 흉흉하게 만들었다.

 

2. 농민부담의 과중

 16세기 농민들은 전세, 공납, 군역의 세 가지 부담이 전보다 무거워졌는데, 그중에서도 공납이 가장 고통스러웠다.

 먼저, 전세의 경우 16세기에 들어와 풍흉의 정도를 9등급으로 나누어 세금을 내는 연분구등법이 폐지되고, 1결마다 4두 혹은 6두로 하향 조정했으나, 실제는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진전에서도 세를 거두어 가는 일이 많아 그 부담이 가벼워진 것이 아니었다. 또 병작을 하고 있는 농민들은 지주에게 수확의 반을 지대로 바치고, 지주가 바쳐야 할 전세를 작인이 내는 경우가 많아 전세율의 감소가 별로 도움을 주지 못했다.

 다음에 공납이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사치와 방탕을 일삼은 연산군 때부터였다. 공납은 액수의 많음도 문제였지만, 그보다는 제 고장에서 나지 않는 물건을 내게 하거나 '인납'이라 하여 1~2년의 공납을 한꺼번에 앞당겨 내기도 하고, 또 방납이라 하여 서리가 상인과 결탁하여 공납물을 미리 국가에 바치고 그 값을 비싸게 책정해서 농민에게 받아냈다.

 16세기에 농민에게 가장 고통을 준 것은 공납으로서, 조헌과 이이 같은 관인들은 그 시정을 정부에 건의했으나 17세기초 광해군 때에 대동법이 실시되면서 공납제의 모순이 완화되었다. 당시 방납을 비롯하여 전세, 군역을 수취하는 과정에 서리들의 농간이 심하여 조식 같은 학자는 '서리망국론'을 부르짖으면서 그 시정을 강력하게 촉구하기도 했다.

 군역도 문제가 많았다. 15세기에는 양인개병제가 비교적 잘 지켜지고, 특히 세조 때에는 보법이 생겨나 거의 모든 장정들이 군역에 편제되었다. 그러나 그 부작용으로 요역인구가 줄어들자 군인을 요역에 동원하게 되면서 군역의 성격이 요역으로 바뀌어갔다. 여기에 성종대 이후로 사림들이 등장하면서 사족은 군역을 피하는 풍조가 일어나고, 농민들이 지는 군역은 가포라 하여 국가에 무명을 바치는 것으로 변했다. 보병에 등록된 사람은 20개월마다 무명 17~18필, 수군에 등록된 사람은 무명 20필을 보인으로부터 조역가라는 이름으로 받아내 이를 삯전으로 내고 품을 사서 자신의 역을 대신 지게했다. 이를 대립 혹은 고립이라고 불렀는데, 대개 대립을 하는 사람은 노비나 유민인 경우가 많았고, 그들은 요역에 주로 종사했다. 이 때문에 군사의 질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농민들은 대립을 위해 내는 삯전이 무거워 농토를 버리고 유랑하는 자가 많아 당시 '열집 중에서 아홉 집이 비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이농현상이 심각했다. 이렇게 이농한 농민들은 상업에 종사하거나, 산속에 숨어 살거나 노비가 됐다.

 중종 32년(1537)에 농민의 군역부담을 줄이기 위해 모든 장정에게 군포라는 이름으로 무명 2필씩을 받아내고, 그 경비로 군대를 모집하여 봉급을 지불하는 일종의 고용군인이 생겨났다. 그리하여 지금까지 국역의 행태를 띠고 있던 군역은 실제로 모병제도로 바뀌어갔다. 16세기에 군적에 등록된 군인은 정병이 18만 명, 잡색군이 18만 명으로 숫자상으로는 15세기보다 줄지 않았으나, 실제 전투에 투입될 만한 군인은 1만 명이 못되었다. 율곡 이이가 10만 양병설을 주창하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사정이 나쁜 시기에 임진왜란을 만나게 된 것이다.

 이밖에도 16세기 농민들을 괴롭힌 것으로 환곡이 있었다. 원래 국초에는 춘궁기에 빈민에게 식량을 대여해 주고 가을에 원곡만을 회수하는 의창제를 실시하였으나, 15세기말부터 원곡이 부족하여 폐지하고, 물가조절을 맡은 상평창이 이를 대신했는데 원곡의 10%를 환곡 혹은 모곡이라는 이름으로 이자를 받아냈다. 그러나 실제로 10% 이상의 이자를 내는 경우가 많아서 고리대로 변해갔다.